황보숭은 자가 의진이고, 강족과 선비의 변란이 끊이지 않는 량주 안정군 조나현 출신1)이었다.황보숭은 도요장군 황보규의 조카이며, 부친 황보절은 당시 북방의 최전방이라고 할 수 있는 병주 안문군의 태수를 지냈다. 후한 시대에는 관리의 임용 시 문무관의 구별이 없었다.
서로 마음을 나누고 함께 수행하는 어느 모임에 참석했다. 일상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털어버리고 순수한 마음을 나누면서 서로를 힐링하는 자리였다. 마침내 둥그렇게 서서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참석한 사람들 간에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 가운데 어느 70대 할머
최초의 농학 박사는 우장춘(1898~1959)이다. 1936년 5월 4일에 도쿄제국대학교로부터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수원 서둔동 여기산 기슭. 농업진흥청이 내려다보이는 양지 바른 곳에 아담한 묘 한 터가 있고, 그 앞에서 다음과 같은 비 문을 읽을 수 있다.「불우와
▲ 이의경 동물학박사최초의 동물학 박사는 1928년 독일 뮌헨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이의경(1899.3~1950.3)이었다. 동물학 박사도 생소하거니와 이의경이란 이름도 생소하겠지만, 그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이다. 바로 그 소설의
어느 목사님이 개척교회를 설립하여 운영을 시작했다. 지하실 작은 공간에서 처음 교회를 시작한 것이다. 신도 수는 자기 가족 이외 몇 명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 교회에 우연히 어떤 청년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청년은 교회에 상당한 애착이 있었다. 그의 애착만큼 모든 교회
관계의 핵심은 마음가짐이다. 어떤 마음가짐을 갖느냐에 따라 그 관계를 통해 일어나는 느낌 생각, 감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다.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
윤치형(1896~1970)은 한국인 최초 박사이자 의학박사이다. 《매일신보》 1924년 6월 11일자에 윤치형의 의학박사 소식을 크게 보도했다.▲조선최초의 청년 의학박사 경성의전출신 윤치형씨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에는 박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윤치
평양에는 1903년 10월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에서 설립한 평양숭의여학교가 있었다. 미국인 교장을 비롯해서 교사들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것에 대하여 강력히 규탄하며, 목숨 걸고 일본에 항거할 것을 호소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앉혀 놓고, 이제부터는 배워야 살고
만남이 곧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 만남 속에 존재하고 있다. 나와 내가 만나있고 나와 남이 만나 있으며 나와 세상이 만나고 나와 땅과 온 우주와 만나고 있다. 만남이 관계로 전환되지 않는 한 그 만남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관계맺음은 우리의 만남에 의미를
장량, 장보의 무리가 봉기를 재촉하는 이면에는 개인적인 야욕이 존재하고 있음을 장각이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자신은 늙고 병약해 갔다. 장각이 죽으면 교단은 현재의 세를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장량과 장보, 그 주변의 교단 지도자들은 장각이 살아있는 동안 세속적 권
후한 왕조의 무질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전한 말 외척 왕망이 혼란을 일으킨 후, 광무제 유수가 이를 평정하여 후한을 건국한 것이 건무 원년(AD 25년)이었다. 이후 적미적, 공손술 등 각지의 도적떼와 군벌들을 정벌하여 전국을 재통일한 것은 11년 후의 일이었
몹시 피곤한 하루였다. 사람들이 물러간 후 장각은 평상에 앉은 채로 잠깐 잠이 들었다. 장각은 산에서 약초를 캐고 있었다. 홀연 맑은 바람이 일어나더니 한 노인이 앞에 나타났다.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학창의를 입은 품새가 속인의 자태가 아니었다. 노인이 손짓으로 장각을
대현량사(大賢良師)거리는 매우 번잡했다. 호박을 실은 일량거를 미는 짐꾼과 강에서 잡은 생선을 담은 멜대를 어깨에 멘 어부 사이를 짐을 가득 실은 마차가 밀고 들어왔다. 마부는 행인을 치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스럽게 말을 몰았다. 장터 한 복판까지 처마를 밀어낸 상점들에
낙양에서 동북으로 일천 팔백 리, 오환, 선비의 땅에 인접한 변방 탁군 탁현에 기울어져 가는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전한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의 곁가지 후손으로 동군 범현의 현령을 지냈던 유웅의 집이었다. 한때 지방의 세도가답게 규모는 있었지만 지붕이 내려앉
여남성 관아 뒷길에 소박한 수레 한 채가 섰다. 일산이 달린 고관용이 아닌 부녀들이 타고 다니는 사방이 막힌 수레였다. 조금 있더니 한 사내가 내렸다. 작은 키였지만 다부진 몸매에 동작이 가벼워 무술을 오래 연마한 것 같았다. 사내는 잠시 길을 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