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최초 농학 박사 우장춘
최초의 농학 박사는 우장춘(1898~1959)이다. 1936년 5월 4일에 도쿄제국대학교로부터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수원 서둔동 여기산 기슭. 농업진흥청이 내려다보이는 양지 바른 곳에 아담한 묘 한 터가 있고, 그 앞에서 다음과 같은 비 문을 읽을 수 있다.
「불우와 고민 속에 진리를 토파 내어 종자 합성, 새 학설을 세계 에 외칠 적에 잠자던 학문의 바다. 물결 한번 치리라.」
최초의 한국인 육종학자이신 우장춘 박사를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비문의 일부분이다.
우장춘 박사를 가리켜 어떤 인물이냐고 질문을 던지면 고개를 갸우뚱 하다가도 ‘씨 없는 수박'을 아느냐고 다시 물으면 “아, 그 분!”하고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사실 ‘씨 없는 수박'은 1943년에 일본인 기하라 히토시(1898~1986)가 개량하였다.
우장춘 박사가 귀국하여 1952년에 이를 시연하였는데, 그때부터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사람으로 전해진 것이다.
우장춘 박사의 걸작으로는 척박한 강원도의 바위땅에 그 유명한 ‘강원도 감자'를 육종시켜 강원도의 특산물로 상품화시킨 것과, 제주도에 ‘제주도 귤’을 생산하는 것, 일본 재래종 채소와 양배추를 교배하여 우리 땅에서 잘 자라고 우리 입맛에 딱 맞는 오늘의 '한국 배추’를 개량한 것, 보잘 것 없는 페튜니아를 정원 화초로 적합하게 만든 이른바 더블페튜니아를 개량한 것들이 있다. 그야말로 신종 식물을 발명한 과학자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종이란 ‘종(種)의 합성'을 의미하는데, ‘종은 자연도태의 결과로 이루어진다'라는 다윈의 학설을 뒤집은 것으로 결국은 수정과 보충을 가하게 되었다.
즉 ‘종은 기존하고 있는 종간(種間)의 교잡으로 새로운 종을 낳는다.'라는 새로운 학설인 이질배수체형성을 뿌리내리게 했다.
그러나 우장춘 박사는 눈부신 업적에도 불구하고 늘 한과 서러움만을 문신하고 살았다.
우장춘은 1898년 4월 8일 동경에서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의 피를 이어받아 태어났다. 왜 그는 일본인 어머니 속에서 태어나야만 했을까. 거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아버지 우범선은 1888년(고종 25년) 별기군 참령이 된 뒤 독립당에 가입했다가 1895년 별기군 훈련 제2대대장이 되어 을미사변의 공신이 된다.
을미사변이란 일본인들이 경북궁에 난입하여 민왕비를 시해하고 친일내각을 성립시킨 사건이다. 민왕비가 시해되던 당시 우범선은 별기군 훈련 제2대대장으로서 대원군을 당당히 호위하며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연출을 하기도한 친일파 정객이었다.
그 이듬해 친일파를 반대하는 친러시아파가 러시아 공사와 결탁하여 고종을 1897년 2월 25일까지 러시아 공관에 거처하게 하는 사건 즉, 아관파천으로 정국이 뒤바뀌자 일본으로 망명을 하고 만다. 바로 이 무렵 일본인 여자 사카이를 만나 국제결혼을 하게 되어 우장춘을 낳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범선의 일본 망명 생활은 불과 3년만인 1901년, 그러니까 우장춘의 나이 세 살 때 민왕비 시해 관련 혐의자로 지목받은 우범선은 수구당이 파견한 자객 고영근에 의해 피살되고 만다.
어머니 사카이 여사는 유복자 우장춘의 동생 우홍춘을 낳게 되나 그들의 생활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게 된다.
우장춘은 6살 나이로 고이시가의 기시모지 고아원 신세를 지게 된다. 기시모지 고아원이라고 해서 우 장춘의 생활이 더 좋아질 턱이 없다. 고아원 원생들은 우장춘을 조센징이니 뭐니 하면서 장난감 가지고 놀듯 몹시 성가시게 했기 때문이다.
“자식들, 두고 봐라. 언젠가는 내가 너희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고 말테야. 나를 조센징? 흥! 쪽발이 같은 새끼들!”
우장춘은 고아원 생활을 하는 동안 하루도 그런 다짐과 자문자답을 빼먹은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어떻게 해서 돈을 마련하여 히로시마의 구레라는 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이때 우장춘은 지긋지긋한 고아원 생활을 면한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는 우장춘의 공부만은 온 정성을 쏟았다. 어느덧 우장춘은 도쿄의 제국대학 공과에 입학원서를 제출하게 된다.
그러나 학비 조달이 막연하였다. 그는 마침 관비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총독부에 신청서를 내어 다행히 장학생으로 뽑혔다.
그런데 수학이 특기인 그는 총독부의 조건부 입학에 따라 농과를 지망할 수밖에 없었다. 1916년 4월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 청강생으로 입학한 그는 일본인 대학생 틈바구니 속에서도 의지를 굽히지 않고 열심히 공부만 한다.
어머니는 우장춘에게 늘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네 아버지는 누가 뭐래도 조선이었다. 따라서 너도 조선인이다.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 조선 땅에 나타날 때 너의 조국은 분명히 너를 존경하게 될 것이다.”
“네, 어머님. 염려 마세요. 기필코 저는 조선인임을 잊지 않을 것 입니다.”
우장춘은 눈물을 줄줄 흘리고 계시는 어머니를 위로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학교 졸업한 그는 곧 바로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 고용원으로 취직이 된다.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고용원보다 더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비록 말단의 직업이지만 그의 타고난 연구력과 근면한 자세로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따낼 수 없는 농사시험장 기수가 되는 데 성공을 하게 된다.
“박사님, 저 같은 놈은 영영 기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박사님은 저를 기수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는 기수가 되던 날 농사 시험장 데라오 박사를 부둥켜안고 그렇게 울 수밖에 없었다. 기수가 되는 데 있어서 사실 데라오 박사의 뒷받침이 컸기 때문이다.
“우장춘 군. 자네의 그만한 실력과 근면 성실한 자세에서는 이 일본인 데라오도 양심을 속일 수 없었네. 모두가 나의 도움이 아니라 자네의 떳떳한 실력이었네.”
데라오 박사는 우장춘을 격려하며 더욱 연구에 몰두할 것을 권유하였다.
우장춘은 생활이 조금씩 좋아지자 1923년 소학교 교사인 와타나베 고하루와 결혼했다. 당시 고하루의 집안에서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었다. 다행히 아내 고하루의 격려로 연구 의욕은 날로 왕성해졌다.
마침내 1936년 5월 4일에는 그의 모교로부터 『종(種)의 합성』이라는 논문으로 농학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농학박사가 된 우장춘은 농림성 농사시험장 만년기사로 발령을 받는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우장춘 박사는 이름이 일본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곳에서 강제 추방을 당해야 하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우장춘 박사는 20여 년간 정들었던 농림성 농사시험장을 그만 두고 주위의 도움으로 다키이 농장에서 초라한 연구생활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할 정도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자 대한원예협회장인 김태홍 씨가 ’우장춘 박사 환국촉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귀국을 돕기로 했다.
이 소식을 접한 우장춘 박사는 김태홍 씨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서신을 보냈다.
「환국의 날을 앞둔 나는 착잡한 감격을 감출 길 없습니다. 해방과 동시에 나는 근 30년간 연구하여 오던 일본의 직장을 사임하고 교토 교외 사원(寺院)의 일우에서 칩거한 지 어언 4년 반, 그동안 나는 고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릅니다. 나의 일편단심은 언제나 조국에도 농업을 연구하는 기관이 생겨서 내 목숨을 바쳐 일할 날이 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1950년 3월 8일, 우장춘 박사는 52세 나이로 가족을 일본에 남긴 채 단신으로 그토록 그리던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 아직은 한국말도 서툴지만 다짜고짜로 중구 저동에 호적을 등재시켜 대한민국 사람이 되었다.
조국의 이름을 '조선'으로만 알았었는데, 광복과 더불어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바뀌었고, 어찌된 일인지 국토는 남북으로 갈라져 있어 낯설었지만, 조국의 몸에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우장춘 박사는 귀국 후 한국농업과학연구소의 소장으로 취임을 했다. 이름이 연구소이지 전기며 수도는 물론 기거할 방조차 제대로 마련되어 않은 형편없는 시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는데, 마땅한 예복이 없어 평상복인 고무신과 잠바 차림으로 경무대를 방문해야 했다.
요즘 같아선 비서실이나 경호요원들로 부터 혼쭐날 일이지만 그 당시는 경제 사정이 그러했으니 우장춘 박사의 그러한 차림에 대해선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닥터 우. 대한민국에 와서 고생을 많이 하는데, 도와 줄 수 없는 것이 몹시 안타까워. 양복 한 벌도 마련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요.”
“각하! 학자는 옷이나 고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연구에 몰두할 많은 시간과 그렇게 할 수 있는 장소만을 소중히 아낄 뿐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우장춘 박사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구한말 아버지의 행적과 어머니가 일본인이었다는 친일문제 때문이었다. 친일문제는 가혹하리만큼 출국정지 처분까지 당해야 했다.
일본에 있는 장녀 결혼식은 물론 어머니의 장례식조차도 가볼 수 없었다. 출국정지를 받은 우장춘 박사는 시체 없는 어머니 장례식을 통곡하며 치룰 수밖에 없었다. 그를 아끼던 친구, 학계 및 유지들의 진정한 애도 속에 장례식을 치른 다음 상당 금액의 부의금이 들어왔는데, 그는 동래 원예시험장에 우물을 파는데 사용했다.
원예 시험장에 우물조차 없었다 하니 그 당시 한국의 경제 사정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런 딱한 사정을 보다 못해 부하 직원이 정부 고위층을 한번 만나 보라고 귀띔을 하자 노발대발 화를 냈다.
“나는 내 조국에서 일하는 보람으로 사는데, 고위층에게 굽실거리며 출세를 하라구!”
일본의 유명한 종묘회사인 마루다네로부터 거액의 스카우트 유혹이 뻗쳐 왔어도 단칼에 거절했다.
“여보세요! 당신네의 거액 스카우트 제의는 나를 다시 한 번 일본인으로 만들려는 처사요! 다시는 그런 유혹하지 마시오!”
우장춘 박사의 연구 집념은 초인간적인 능력이었다. 북위 36도 이북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이모작 벼를 연구하여 식량생산에 큰 기여를 했다.
1958년 캐나다에서 국제유전학회가 열린 바 있었는데, 그때 스웨덴의 유명한 유전학자 윤찬 교수는 우장춘 박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강연의 구절을 남겼다.
“나의 오늘을 위하여 귀중한 연구 재료를 보내주신 한국인 우장춘 박사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가 유전학계에 공헌한 획기적인 업적과 함께 이국의 동료에게 베푼 친절은 영구히 기억될 것입니다.”
자신의 건강조차 돌볼 틈도 없이 육종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치료시기를 놓쳐 사망 직전에서야 중앙의료원에 입원했다. 임종 전에 유언처럼 그가 연구 중인 벼를 보여 달라고 했다.
“이 벼! 끝을 보지 못하고 내가 먼저 죽어야 하다니.” 한 손에는 그 벼를, 다른 손에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수여한 문화포장을 꼭 쥐고서 눈을 감았다.
52세에 단신으로 귀국하여 9년 동안 조국의 육종 연구에 불꽃을 피우다가 1959년 8월 10일 천상의 원예원으로 세상을 옮긴 우리나라 최초의 남자 박사 우장춘은 한국인의 진정한 넋이 무엇인가를 후진들에게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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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정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