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최초 동물학박사 이미륵

▲ 이의경 동물학박사

최초의 동물학 박사는 1928년 독일 뮌헨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이의경(1899.3~1950.3)이었다.

동물학 박사도 생소하거니와 이의경이란 이름도 생소하겠지만, 그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이다. 바로 그 소설의 저자 이미륵의 본명이 이의경이다. 이제야 “아하 그렇구나!”하고 무릎 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우리 귀에 익숙한 이미륵이란 이름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기로 한다.
이미륵은 1899년, 음력 3월 초파일에 황해도 해주 서영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동빈은 해주에서 상인으로 성공한 천석군 부자이기도 하였지만, 감찰의 벼슬도 지닌 사람이었다.
1남 3녀 중 막내이자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어릴 때 별명은 배꼽 밑에 우물 정자 표시가 있어서 ‘정쇠’였다고 한다.
다섯 살부터 사촌들 틈에 끼여 천자문이며, 소학을 익혔고, 열 살 무렵에는 사서삼경은 물론 통감 전권을 읽었을 정도였다니 매우 총명했었던 같다.
해주에는 고등보통학교가 없어서 강의록으로 공부해 경성의전에 합격했다. 방학 때는 고향으로 돌아와 계몽활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특히 음악을 좋아해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친구들과 어울려 즐겨 놀기도 했다.
당시 일본어로 번역된 독일 철학서들을 탐독하였는데, 천성적으로 의학보다는 철학이나 문학에 관심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는 항일독립운동 학생이었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알리는 격문과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는데, 당시 국립대학이었던 경성전문학교에는 가장 늦게 통보가 되었다.
이미륵은 친구인 이상규로부터 그 동안 시위운동이 폭넓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적극 가담할 것을 굳게 맹세했다.
3월 1일 종로 파고다공원에서 펼쳐진 첫 시위운동에 참여하고, 4월에 상해 임시정부가 탄생하자, 외교활동을 행동강령으로 한 대한청년외교단이 결성되는데, 이 단체에서 외교시보 발행과 전단을 인쇄하는 일을 맡아 활동을 하게 된다.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수시로 전해 온 경고문 등을 배포하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연계해 전국에서 모아진 독립자금을 수합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1919년 11월, 첩자에 의해 한청년외교단의 활동정보가 노출되면서, 핵심인물들이 8명이 긴급체포 되었고, 이미륵도 일본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23살 이미륵은 곧 바로 상해로 피신하였고, 그곳에서 대한적십자대 대원으로 발탁되어 임시정부의 일을 돕는다. 의대생이었던 그는 간호사를 교육시키는 일을 도왔다.
상해에서 중국어를 익히는 동안 안중근의 동생 안봉근을 만나게 되었다. 이미륵이가 독일로 가겠다고 하자 안봉근은 필요한 경비까지 마련하여 적극 도왔다.
중국 여권을 가지고 안봉근의 도움으로 마르세이유에서 조선을 잘 아는 빌헬름 신부를 만나 프랑스를 경유하여 1920년 5월 26일 독일의 뮌스트슈바르트짜하 수도원에 도착했다.
빌헬름 신부는 수도원에 이미륵을 잘 부탁하고서 안봉근과 함께 떠났는데, 이때부터 혼자 남아 수도원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수도원에서 독학으로 독일어를 공부하고, 필수적인 카톨릭 교리도 배웠다. 독일어 공부는 안봉근이가 추천한 코트프리트 켈러의 작품 《녹색의 하인리이》를 수백 번 읽으며 열심히 배웠다.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오후에는 수도원 후문을 지나면, 넓은 들판과, 그 사이로 흐르는 실개천을 따라 산책을 즐기며 소일했다.
어느 하루는 날이 어두워질 무렵들에서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부인이 처음 본 동양인 이미륵을 보더니만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식인종이라고 외치며 도망친 적도 있었다.
수도원은 우리나라 농촌 풍경과 비슷했다. 소와 돼지도 기르고, 우유 짜고, 야채심고, 감자 심으며 자급자족을 하는데 별로 어려움은 없었다.
초겨울 쯤 수도원에서 나와 뷔르츠부르크로 개인집을 얻어 독립했을 때 언어소통이 가능했을 정도였다니 그 책으로 얼마나 독일어를 독학했는지 짐작 되었다.
방을 얻어 독립하였지만 돈을 가지고 갔던 상황이 아니라서 경제적 도움은 수도원에서 알선한 카톨릭 신자들의 정기적인 후원금이었다.
1921녀부터 1923까지 뷔르츠부르크대학교와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의학 전공을 전공했다. 1925에 돌연 의학을 그만 두고 뮌헨 대학교 동물학과로 전과했다.
그 까닭은 수술실에서 환자가 사망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의료진이 환자의 죽음에 대해 별로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냉정하게 돌아서는 것을 보고, 의학의 냉혹성에 대한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대학 생활은 주로 장학금과 주위의 도움으로 겨우 유지했다. 수학과 교수의 딸 로자 마우러는 집에서 받은 용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이미륵에게 주었고, 이런 사이로 연인관계까지 진행되었다.
사업가인 에곤 에두아르트 베너는 하루 1마르크 50펜니히로 식사를 해결해야했던 가난한 유학생 이미륵, 같이 생활했던 쿠텐존, 영국인 투비와 의대생 바흐만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다.
1928년 7월, 그러니까 의학을 포기하고 뮌헨대학에서 동물학을 전공한지 만 3년 만에 이미륵은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하여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구 논문은 『비정상적인 조건 하에서 플라나리아 재생에 나타나는 규칙적인 현상』에 대한 연구였다.
연구 논문의 핵심인 재생이란 다양한 형태의 손상을 통해 기관을 상실해버린 부분을 스스로 대체하면서 새로운 유기체로서 거듭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하여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이미륵은 어렵게 동물학 박사 되었지만, 그와 관련된 일과는 엉뚱하게 소설가로 활동하였는데,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동물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귀국할 수 없는 일제강점기 조국의 현실과,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때문이었다.
이미륵은 독일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도 독립운동을 잊지 않았다.
1927년 2월 5~1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 피압박 민족 회의’에 유학생 신분으로 참석하여 조선의 독립을 호소했다.
이때 소르본느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던 김법린(1889~1964. 전 문교부 장관, 전 동국대 총장),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던 이극로(1897~1982. 조선어 사전 편찬), 황우일 등과 함께 조선의 상황을 세계에 알리고 독립을 주장하였다.
이미륵의 항일운동은 일본으로부터 유럽 거주 요주의 조선인 명단에 윤보선과 함께 수배되기도 하였다.
이미륵은 본연의 소질은 글쓰기로 항일의 의지를 많이 표현했다. 그가 독일에서 처음으로 소설을 발표한 것은 1931년 《하늘의 천사》였다.
본명 이의경을 두고 필명 이미륵을 사용한 것은 1935년 《수암과 미륵》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1934년 2월 9일에는 독일 신문에 ‘한국과 한국인’이라는 논평을 기고해 일제의 한국 침략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932년부터 자전소설을 틈틈이 준비했는데, 마침내 1946년 5월 독어 《압록강은 흐른다》로 출간되었다.
1954년 영역판으로 영국에서 출간, 1956년 미국에서 출간, 우리나라에는 1959년에 번역되어 소개되었는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인구회자되고 있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이미륵의 유년시절부터 독일 유학에 이르기까지의 체험을 회상 형식으로 서술한 자전소설이었다. 근대화에서 식민지시대에 이르는 역사적인 변혁기를 배경으로 이미륵의 소년시절·가족관계·교우관계·학교생활을 비롯하여, 정신적이며 실제적인 관심사들을 서술하였다.
1950년 3월 20일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 그레펠핑 시립 공동묘지에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하여 1990년 12월 26일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레펠핑 시립 공동묘지의 사정이 생기자 한국에서 정부1997년 3월 20일에 뮌휀역에서 약 15km로 차로는 30분정도 걸리는 그래펠핑에 넓은 땅을 마련하여 이장하고 묘비까지 세웠다.
이미륵 동물학 박사가 학자의 길 보다는 작가의 길을 걷다가 세상을 떠난 것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의 비운이었다.
그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의 한 장면을 결코 잊을 수가 없어서 여기에 옮겨 놓는다.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고 3.1운동에 가담한 나는 쫓기는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어머니는 도망쳐야 한다면서 마을 어귀까지 나를 배웅하며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내생에 있어서 나에게 정말 많은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자, 얘야! 이젠 너 혼자서 네 길을 가거라!”
달빛이 비치는 압록강을 건너고 난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고국산천을 보기위해 언덕으로 올라가 뒤돌아보니 우리 마을과 꼭 닮은 마을이 보이고 여전히 압록강은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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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정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