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 작가중평5년(188년) 2월, 혜성이 나타나 자궁1)을 범했다. 황건적의 잔당인 곽대 등이 하서군 백파곡(白波谷)에서 일어나 태원군과 하동군을 약탈했다. 이들을 백파적이라고 불렀다. 삼월에는 북방 오랑캐인 도각호(屠各胡)가 병주를 공격해 병주자사 장의를 죽였다.
이심(異心)을 품은 자들이 나타나다. 모든 원인이 황제와 그 측근 환관들에게 있었음에도 스스로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사대부들 중 한나라 황실에 기대를 접은 사람들이 점차 늘어갔다. 이렇게 되자 흑심을 품는 자들이 나타났다. 황건적이 평정되고 나서 좌거기장군 겸 기주
황건적의 난이 평정된 것은 그해 12월 29일 이었다. 조정에서는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중평원년(184년)으로 고쳤다. 백성들의 처지는 개선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수십만이 죽어나갔을 뿐이었다.조정은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중평2년(185년) 2월 남궁(南宮)
황건적의 난 중에도 조정 내에서의 권력 투쟁은 그치지 않았다. 주로 환관 집단과 사대부 출신의 관료집단 간의 대립 구도였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복잡했다. 개인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환관 중에도 이름난 사대부들을 환제에게 적극 추천해 조정중신으로 키워준 조등과 같은 인
기주, 유주 등 북방의 황건적 토벌은 북중랑장 노식1)이 맡았다. 유비가 한때 스승으로 모시고 그 밑에서 공부를 했었듯이 노식은 원래 학자였다. 마융의 제자로 후한말 훈고학의 대가 정현과 동문수학했었다. 하지만 키가 8척 2촌으로 거구였고 목소리가 우렁차 문무를 겸전했
황보숭은 자가 의진이고, 강족과 선비의 변란이 끊이지 않는 량주 안정군 조나현 출신1)이었다.황보숭은 도요장군 황보규의 조카이며, 부친 황보절은 당시 북방의 최전방이라고 할 수 있는 병주 안문군의 태수를 지냈다. 후한 시대에는 관리의 임용 시 문무관의 구별이 없었다.
장량, 장보의 무리가 봉기를 재촉하는 이면에는 개인적인 야욕이 존재하고 있음을 장각이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자신은 늙고 병약해 갔다. 장각이 죽으면 교단은 현재의 세를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장량과 장보, 그 주변의 교단 지도자들은 장각이 살아있는 동안 세속적 권
후한 왕조의 무질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전한 말 외척 왕망이 혼란을 일으킨 후, 광무제 유수가 이를 평정하여 후한을 건국한 것이 건무 원년(AD 25년)이었다. 이후 적미적, 공손술 등 각지의 도적떼와 군벌들을 정벌하여 전국을 재통일한 것은 11년 후의 일이었
몹시 피곤한 하루였다. 사람들이 물러간 후 장각은 평상에 앉은 채로 잠깐 잠이 들었다. 장각은 산에서 약초를 캐고 있었다. 홀연 맑은 바람이 일어나더니 한 노인이 앞에 나타났다.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학창의를 입은 품새가 속인의 자태가 아니었다. 노인이 손짓으로 장각을
대현량사(大賢良師)거리는 매우 번잡했다. 호박을 실은 일량거를 미는 짐꾼과 강에서 잡은 생선을 담은 멜대를 어깨에 멘 어부 사이를 짐을 가득 실은 마차가 밀고 들어왔다. 마부는 행인을 치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스럽게 말을 몰았다. 장터 한 복판까지 처마를 밀어낸 상점들에
낙양에서 동북으로 일천 팔백 리, 오환, 선비의 땅에 인접한 변방 탁군 탁현에 기울어져 가는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전한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의 곁가지 후손으로 동군 범현의 현령을 지냈던 유웅의 집이었다. 한때 지방의 세도가답게 규모는 있었지만 지붕이 내려앉
여남성 관아 뒷길에 소박한 수레 한 채가 섰다. 일산이 달린 고관용이 아닌 부녀들이 타고 다니는 사방이 막힌 수레였다. 조금 있더니 한 사내가 내렸다. 작은 키였지만 다부진 몸매에 동작이 가벼워 무술을 오래 연마한 것 같았다. 사내는 잠시 길을 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