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황건적의 난 이후3.

혼군 영제

황건적의 난이 평정된 것은 그해 12월 29일 이었다. 조정에서는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중평원년(184년)으로 고쳤다. 백성들의 처지는 개선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수십만이 죽어나갔을 뿐이었다.
조정은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중평2년(185년) 2월 남궁(南宮)의 운대(雲臺)에서 불이 났다. 연이어 낙성문(樂城門)에서도 불이 났다. 중상시 장양과 조충은 중건비용을 조달한다는 명목으로 황제를 설득해 천하의 모든 전답에 마지기 당 십 전의 세금을 추가로 걷기로 했다. 녹아서 없어진 동인(銅人)을 다시 주조한다는 핑계로 부가적으로 세를 신설했다. 과중한 부세로 백성들이 난을 일으켰는데 부세와 요역을 감면하기는 고사하고 증세를 했다. 백성의 삶은 먼 곳에 있었고, 눈앞에 있는 타버린 궁성은 흉물스러웠다. 영제와 측근 환관들은 이토록 현실감각이 없었다.
보다 못한 낙안태수 육강(陸康)1)이 상소를 올려 간했다.
“옛적에 노나라 선공이 전답에 세를 부과하자 메뚜기 떼의 피해가 절로 발생하였습니다. 애공이 부역과 세금을 증가시키자 공자께서 비판했습니다. 백성들로부터 물자를 빼앗아 쓸모도 없는 동인을 만들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어찌하여 성인의 가르침을 버리고 스스로 망한 나라의 법도를 따르는 것입니까!”
내시들은 육강이 황제를 망국의 예에 비유함으로써 대불경죄를 저질렀다고 참소했다. 육강은 곧 붙잡혀 함거에 실린 채로 정위에게 보내졌으나 시어사 유대(劉岱)2)가 표를 올려 육강의 상소가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해명해 간신히 풀려났다. 육강은 면직당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육강은 양주 오군의 오래된 명문가 출신이었다.

영제는 또 각 주군에 조서를 내려 궁실을 조영하기 위한 재목과 무늬가 있는 석재를 채취해 경사에 보내도록 했다. 환관들은 이를 이용해 또 장난을 쳤다. 물품 검수를 담당한 황문상시(黃門常侍)들이 항상 품질이 부족하다고 야단을 치며 불합격을 놓았다. 그 무거운 물건들을 지고 날라 왔다가 불합격을 받은 지방관리들은 목재와 석재들을 납품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곤경에 처했다. 환관들은 이들에게 이 물품들을 십분의 일 가격에 팔도록 강요했다. 그리고는 지방관들에게 이 물품들을 시가대로 되사게 했다. 지방관들이 환관들에게 이것들을 다시 사서 납품하면 또 목재가 썩었다고 퇴짜를 놓았다.
한편에서는 목재가 쌓여 썩어가도 궁실은 몇 년이 지나도록 완성이 되지 않았다. 자사와 태수들은 의무를 이행하느라 든 비용을 뽑기 위하여 제 맘대로 다시 세금을 징수했다. 환관들의 악질적인 수법에 백성들의 입에서 고통의 신음소리만 깊어갔다.


매관매직

매관매직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자사와 이천석급 관리가 되거나, 무재(茂才)나 효렴(孝廉)으로 추천받기 위해서는 서원3)으로 가서 환관들과 가격을 협상한 후에야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청렴한 인사들은 관료가 되고자 하지 않았다. 이러자 벼슬을 받도록 강요하기까지 했다.
그 당시 하내군 출신의 사마직(司馬直)이 새로 거록태수에 임명되었다. 그는 청렴한 인사로 이름이 났으므로 특별히 삼백만 전으로 감면받았다. 사마직은 임명조서를 받자 관직을 거부하는 것도 여의치 않음을 탄식하며 말했다.
“관원이 되는 것은 백성을 위하여 부모 노릇을 하라는 것인데, 요즘 세상은 오히려 백성의 껍질을 벗기라 하니 참을 수가 없구나.”
그는 질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부임지로 가던 중 맹진(孟津)에 이르렀을 때 사마직은 황제에게 글을 올려 그 당시 저질러지고 있는 잘못들에 대해 극진히 간하고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영제는 사마직의 상소를 읽고 난 후에야 궁전수리비 명목으로 걷던 돈의 징수를 잠시 멈추게 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정위(廷尉) 벼슬에 있던 최열(崔烈)3)이 3월에 사도(司徒)가 되었는데 뒷말이 무성했다. 그 당시에는 삼공이 되기 위해서도 십상시들을 통해 서원에 돈을 바쳐야만 했다. 단경(段穎)이나 장온(張溫)과 같이 혁혁한 공을 세우고 명예가 드높은 사람들조차도 재물을 바치지 않고서는 삼공의 지위에 오를 수 없었다.
최열은 영제의 유모를 통해서 오백만 전을 바치고 사도가 되었다. 명망이 높았으므로 반값으로 할인받은 것이다.
황제가 친히 임명하는 자리에 만조백관이 모두 모였다. 영제는 가까이에 있는 환관들을 돌아보고 아쉬운 듯이 말했다.
“좀 더 짜게 굴 걸 그랬소. 천만 전은 너끈히 받아낼 수 있었는 데...”
이 말을 들은 유모 정부인(程夫人)이 옆에 있다가 당황해서 말대답을 했다.
“최공은 기주(冀州)의 명사인데 어찌 돈을 주고 관직을 사겠습니까! 저에게 부탁하여 관직을 얻게 된 것인데 그걸 모르셨나요!”
한편의 희극이었다. 이런 황제에게 백성이 기대할 것은 없었다.
최열은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다. 사람들은 ‘일개 아낙네에게 부탁해 벼슬을 얻었다면, 차라리 돈을 주고 산 것만 못하지 않나?’고 비아냥거렸다. 최열은 부끄러워 문밖출입을 못했다. 호분중랑장인 장남 최균(崔鈞)이 집에 돌아오자 최열은 바깥 여론이 궁금해 물었다.
“이 애비가 삼공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에 대해 세상에서는 뭐라고 평가하더냐?”
최균이 대답했다.
“아버님께서는 젊어서 명사로 이름이 났고 이미 군수와 구경을 역임하셨으니 삼공의 지위에 올라도 부끄러울 것은 없다고 말합디다. 그렇지만 이번 일로 천하 사람들을 실망시키셨습니다.”
“어째서 그러냐?”
“아버님의 몸에서 돈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최열이 아비에게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며 지팡이를 들어 최균을 후려치려고 하자, 최균은 갑옷을 입은 채로 쩔렁거리며 이리저리 도망쳤다고 한다.

중평 2년(185년) 6월 황건적의 난을 토벌하는데 아무 기여도 한 적이 없는 장양 등 중상시 열두 명이 다 열후에 봉해졌다. 반면에 일선에서 힘써 싸워 진짜 공을 세운 장수들의 상훈은 삭감되었다.
황보숭이 장각을 토벌할 당시 업성을 거쳐 갔다. 그 때 중상시 조충의 집이 지나치게 크고 화려해 법을 어긴 것을 발견하고는 황제께 상주하여 몰수한 적이 있었다. 또 중상시 장양이 사적으로 오천만 전의 돈을 요구했으나 황보숭이 이를 거절했다. 이로 인해 이 두 사람은 황보숭을 미워했다.
뒷날 황보숭이 변장과 한수의 반란을 치러 갔을 때 난이 쉽게 평정되지 않자, 조충과 장양 등이 황보숭이 여러 번 싸웠으나 공이 없고 전비만 많이 소모한다고 주청해 황보숭을 소환했다. 황보숭은 좌거기장군에서 면직되었고 식읍 육천호도 삭감 당했다. 황건적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주었던 것을 거의 다 빼앗은 셈이다. 황보숭이 이럴진대 다른 무명의 장수들과 관리들에 대한 대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도적떼의 봉기

상황이 이러하니 백성들의 생활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황건적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도처에서 크고 작은 도적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황건적이 난이 일어난 중평원년(184)에 익주 파군(巴郡)에서는 오두미교(五斗米敎)의 반란이 일어났다. 황건적의 난에 호응한 것이다. 오두미교는 원래 황건적의 태평교와 마찬가지로 도교 계통의 민중종교였다. 애초에 장릉(張陵)이 익주의 성도(成都)지역에서 시작한 종교집단으로 도가의 전통에 따라 주술적인 치병(治病)을 하고 그 사례로 쌀 다섯 말을 바치게 해서 오두미교라는 이름이 생겼다.
치료법은 주로 환자를 조용한 방에 앉게 한 후, 자신의 죄를 반성하는 글 세 통을 써서 하늘과 땅과 물을 관리하는 신들에게 바치고 속죄용으로 공물을 바치면 병이 낫는다고 했다. 장수(張脩)를 수령으로 7월에 봉기했는데 익주와 한중의 군현을 침탈했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황건적과 구별하여 미적(米賊)이라고 불렀다.

량주(凉州)에서는 북지(北地)군의 선령강족(先零羌族)과 포한(枹罕), 하관(河關) 등지의 군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원래 량주는 이민족과 잡거하던 변방이어서 강족, 호족과 이 지역을 떠돌아다니던 도적떼들이 심심찮게 반란을 일으키던 곳이었다. 이들 여러 무리의 도적들은 황건적의 난으로 조정에서 손을 쓸 수 없는 틈을 타 크게 소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황중의종5)의 호족 수령 북궁백옥과 이문후란 자를 공동으로 추대해 장군으로 삼고, 호강교위6) 령징을 죽였다. 금성군의 변장(邊章)과 한수(韓遂)가 평소에 서량에서 명성이 높았으므로, 도적들은 이들을 유인한 후 협박해 군정을 맡게 했다. 이어서 금성태수 진의를 죽이고 주와 군을 공략하고 불태웠다. 조정에서는 이를 변장, 한수의 난이라고 불렀다. 서량에서의 반란은 조정에서의 대대적 토벌에도 불구하고 쉽게 진압되지 않았고, 동탁의 집권 시까지도 산발적으로 계속되어 조정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중평 2년(185년)에 이르러서는 도처에서 도적떼들이 일어났다. 황건적의 난에 가담했던 농민들이나 지방의 도적들 중 살아남은 자들이 갈 곳이 없어 떼강도가 되었고, 여기에 조정의 학정이 더해져 백성들이 살기 위한 수단으로 도적떼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도적들로 박릉의 장우각, 상산의 저비연과 황룡, 좌교, 우저근), 장백기, 유석, 좌자문팔, 평한대계, 사례의 연성, 뇌공, 부운, 백작, 양봉, 우독, 오록, 이대목, 백요, 휴고, 고추 등의 무리가 있었다. 이 외에도 도적떼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그 수효를 셀 수 없었다. 목소리가 큰놈은 뇌공, 백마를 타고 다니는 자는 장백기,몸이 날랜 자는 비연,콧수염이 많은 자는 어저근,눈이 큰 자는 대목, 옴팡눈을 가진 자는 휴고 이런 식으로 각자 별명을 지어 불렀다. 큰 무리는 2~3만, 적은 무리는 6~7천 명씩 되었다. 대부분 산과 골짜기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장우각과 저비연이 군사를 합해 잉도현을 공격하다가 장우각이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장우각은 죽으면서 저비연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주고 자신이 이끌던 무리들에게 비연을 수령으로 섬기도록 했다. 비연은 원래 날래고 용맹하며 매우 빠르게 달려서 군중에서 그를 비연이라고 불렀다. 비연이 이름을 장연(張燕)으로 바꾼 후 사졸들의 신임을 얻으니 중산군, 상산군, 조군, 상당군, 하내군의 여러 산간계곡에 근거를 둔 도적들이 다 그에게 귀순해 그 수효가 백만에 이르렀다. 자칭 흑산적(黑山賊)이라 했다.
장연이 하북 지방의 여러 군현을 약탈하니 그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조정에서는 토벌할 능력이 없었다. 마침 장연이 경성에 사절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청하자 조정에서는 그를 평난중랑장(平難中郎將)에 임명하고 하북제산곡사(河北諸山谷事)를 겸직하게 했다. 이때부터 장연은 여러 해 동안 효렴으로 조정에 관리를 천거하기도 하고 부하 관리를 임명하기도 하면서 사실상 자치정부를 운영했다.

중평3년(186년) 2월에는 강하군에서 일개 병사인 조자가 반란을 일으켜 황건적의 난을 진압할 때 맹활약했던 남양태수 진힐을 죽였다. 10월에는 무릉군의 만이(蠻夷)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12월에는 선비족이 유주와 병주 2개 주를 침략했다.
중평 4년(187년)에는 형양군에서 도적떼가 중모현령을 죽였으며, 서량에서는 변장, 한수의 진영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한수가 변장과 북궁백옥, 이문후를 죽이고 반란군 병사 십여 만을 합한 후, 농서군으로 진격해 포위하자 농서태수 이상여가 조정을 배반하고 한수에게 합세했다.
유주에서는 장순(張純), 장거(張舉)의 반란이 일어나 오환족 수령 구력거(丘力居) 등과 연합해 동북쪽 변방을 크게 혼란스럽게 했다. 10월에는 형주 장사군에서 도적출신 구성(區星)이 자칭 장군을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12월에는 도각호(屠各胡)가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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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정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