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황건적의 난 이후2
궁중 암투
황건적의 난 중에도 조정 내에서의 권력 투쟁은 그치지 않았다. 주로 환관 집단과 사대부 출신의 관료집단 간의 대립 구도였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복잡했다. 개인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환관 중에도 이름난 사대부들을 환제에게 적극 추천해 조정중신으로 키워준 조등과 같은 인물도 있었고, 영제 즉위 초 외척인 대장군 두무, 사대부를 대표하는 승상 진번과 협력해 왕보, 조절 등 국정을 농단하던 환관들을 처치하려 했던 정삽과 같은 인물도 있었다. 반면에 사대부 중에도 권력 실세인 십상시에게 줄을 대, 개인의 영달을 꾀하는 자들도 많았다. 이응 등 청류 명사를 지지하는 세력은 당고의 금에 걸려 거의 모두 숙청되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이후, 조정 내의 세력들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함께 모색하기보다는 이를 이용하여 상대방을 공격하는데 더 열을 올렸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어전 긴급회의에서 황보숭이 당고 인사들을 해금해줄 것을 건의한 바 있었다. 황제는 중상시 여강과 이 일을 의논했다. 여강은 환관이었지만 당고 명사 등 사족들과 비교적 가까운 인물이었다.
“당고의 금이 오래 지속되어 사대부들 사이에 분하고 원통해 하는 여론이 있습니다. 당고 인사들을 용서하여 사면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장각의 무리에 합세해 모의에 가담할 것이니 사태변화가 심각해질 것입니다. 그때 가서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먼저 측근들 중 탐욕스럽고 물을 흐리는 자들을 주살하고, 당인들에 대해 대사면을 실시한 후, 자사와 이천석급 관리들의 능력을 공정하게 평가하여 임면한다면 도적들은 곧 평정되고야 말 것입니다.”
영제는 당고 인사들에 대해 대사면을 실시했지만, 환관들의 권력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영제 즉위 초, 외척과 사족의 연합 세력을 대표하는 두무와 진번이 제거된 후, 실질적 권력은 궁정쿠데타의 주역인 조절, 왕보 등 환관들의 손안에 있었지 황제에게 있지 않았다. 영제가 성인이 되어 자립하게 된 것도 실세 환관집단의 묵시적 동의와 지지 덕분이었다.
황건적의 난 당시에는 중상시 조충, 장양, 하운, 곽승, 단규, 송전 등의 집단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열후에 봉해져 귀한 신분의 총신들이 되었다. 황제는 항상 ‘장상시는 내 아버지고, 조상시는 내 어머니다.’라고 하고 있었으니 어찌 이들의 권력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을까.
단지 십상시 중 하나였던 봉서와 서봉이 황건적과 내통한 사실이 발각된 것을 기화로 영제는 환관들의 세력을 약간이나마 견제할 수 있었다. 영제는 여러 중상시들을 불러 질책했다.
“너희 환관들이 항상 말하기를 당고 인사들이 불궤를 꾀한다고 해서 그들을 다 금고에 처했고, 그중 일부는 처형했다. 이 사람들을 국가에서 다시 기용하게 되었고, 환관 중에서 장각과 내통한 자들이 나타났으니 이제 너희들을 참수해야 할까?”
환관들이 모두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당고의 금은 다 왕보와 후람이 한 일입니다!”
조충과 장양 등은 죽은 사람들에게 핑계를 대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죄하며 모두 사직하겠다고 청했다.
영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더이상 손대려 했다가는 제 2의 궁정쿠데타가 발생하지 말라는 보장도 없었다. 환관들 역시 근신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수도인 낙양에 거주하면서 온갖 이권에 개입하고 오만방자하게 횡포를 부리던 집안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 고향으로 돌아가 살게 했다.
영제는 환관들의 기가 꺾인 틈을 타 자신의 처남 하진을 대장군에 임명해 황건적 토벌의 총책임을 맡도록 함으로써 친위세력을 강화했다. 이 일로 환관들은 여강을 몹시 미워했다. 조충과 하운을 중심으로 여강과 그 일파를 참소했다. 여강이 정사를 의논한다며 조정에서 당고 인사들과 함께 모여 곽광전(霍光傳)을 수회에 걸쳐 읽었고, 여강의 형제들이 모두 탐욕스럽고 추잡한 짓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영제는 몹시 놀랐다. 특히 영제를 자극한 부분은 여강과 당인들이 곽광전을 읽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곽광은 전한시대의 대정치가로 소제(昭帝)와 선제(宣帝) 시절에 이십여 년 간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곽광은 한무제가 죽은 후, 여덟 살에 즉위한 어린 소제를 황후의 외할아버지 자격으로 보좌하면서 선정을 펼쳤다. 무제 시절의 잦은 대외 원정으로 민중의 생활이 매우 궁핍해졌는데 곽광은 이를 구제하고자 부역을 줄여 백성들을 삶을 편안하게 했다. 또 원망의 대상이었던 소금과 철, 술에 대한 전매제도를 폐지했다. 소제가 젊은 나이에 죽자 곽광이 무제의 손자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즉위시켰으나 이십 칠일만에 폐하고, 다시 선제(宣帝)를 세운 일이 있었다.
곽광은 선정을 펼쳤으므로 황제를 폐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은(殷)나라 시대 태갑(太甲)을 폐출했던 이윤(伊尹)과 더불어 그 선의를 인정받아 유교적 봉건윤리가 지배하던 시대에도 훌륭한 정치가로 평가받았다.
문제는 반역자나 찬탈자들이 모두 이 이윤과 곽광의 고사(伊霍之事)를 예로 들어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여강이 외척이 중심이 된 당고 인사들과 왜 곽광전을 탐독했겠는가. 영제는 뒷골이 서늘했다.
즉시 중황문에게 호위병을 이끌고 가 여강을 잡아들이라 명했다. 중황문은 황궁의 중문을 호위하는 병사들을 지휘하는 환관으로 조충의 일당이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렸다는 말을 전해들은 여강은 분노를 표했다.
“내가 죽으면 난이 일어날 것이다! 장부가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자 할지언정 어찌 옥리들에게 심문을 받을 수 있으랴!”
여강은 체포를 거부하고 자살했다.
당시 내시들이 관장하고 있었던 북사옥은 가혹한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다. 환관들의 변태적 가학증과 전문적인 고문기술자들의 기술이 결합돼 없는 죄인도 만들어내는 곳이었다. 같은 내시로서 그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여강은 그곳에서 문초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조충과 하운은 다시 영제에게 참언했다.
“여강이 조서를 받고 그 내용이 뭔지도 모르면서도 두려워 자살한 것을 보니, 그 간사함이 심히 명백합니다.”
이어서 여강의 일족을 모두 체포하고 가산을 적몰해 다른 환관들에게 본보기를 보였다.
이를 본 시중(侍中) 향허가 상소를 올려 황제의 측근 환관들을 비꼬았다. 풍자만 했음에도 장양은 향허가 장각과 같은 마음을 품었다고 무고해 황문사옥에 가두고 고문해 죽게 했다.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일고 있는 조정 내외의 비판 여론을 봉쇄하려는 시도였으나 잘 먹혀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낭중 장균이 상소를 올려 핵심 실세인 심상시를 공격했다.
“장각이 능히 군사를 일으켜 난을 일으키고 만백성이 그에게 기꺼이 가담한 까닭을 생각해 보건데 그 원인이 모두 십상시에게 있습니다. 십상시가 그들의 친인척과 그에 빌붙어 있던 빈객들 여럿을 각 주와 군에 자사나 태수 직을 맡도록 내보냈고, 이들이 부임해 불법적으로 재물과 이익을 독점하고 백성들의 권리를 침탈하고 약취하기를 일삼았습니다. 백성들이 원망스럽지만 고소할 수도 없으니 불궤한 짓을 꾀하게 된 것입니다. 먼저 백성들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십상시들을 모두 참해 그들의 목을 남문 밖에 효시한 후 사자를 보내 천하에 이 사실을 알리면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지 않아도 도적들이 스스로 소멸할 것입니다.”
장균은 십상시가 모든 환난의 원인이니 이들만 제거하면 난을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도한 부세와 착취가 난의 원인이라는 것은 교지(交趾)에서 일어난 반란을 가종(賈琮)이 평정한 사례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해 교지에서도 반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조정은 일개 현령에 불과했던 가종을 교주자사로 임명해 난을 진압하라 보냈다. 가종은 수행하는 군대도 없이 단신으로 임지에 부임했다. 가종이 한 일은 단순했다. 반란의 원인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 듣고는 요역을 전과 같은 수준으로 줄이고 과중한 조세부과를 금지했다. 지방 수령 중 백성들에게 피해를 심하게 준 자들을 처벌하고 선량한 관리를 선발하여 일을 맡겼다.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자 반란은 저절로 평정되었다. 교지군 백성들은 거리에서 노래를 지어 불렀다.
“가부(賈父)가 일찍 왔더라면 어찌 우리가 반란을 일으켰을까! 지금 세상이 맑고 평안하니 관리들이 감히 해먹지를 못하네!”
반란의 주범은 사실상 황제 자신과 그 측근들이었다. 장균의 상소를 보고 영제는 반성하기는커녕 이를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악용했다. 영제가 장균의 상소를 여러 환관들의 처소로 내려보내자, 십상시들은 모두 관을 벗고 맨발로 걸어와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
“소신들은 죄가 크니 제 발로 낙양의 옥에 들어가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아울러 소신들의 가재를 출연하고자 하니 군비에 보태 쓰게 해 주십시오.”
환관들이 일단 황제 앞에 납작 엎드린 모습을 보이자, 영제는 환관들을 더이상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영제는 조서를 내려 관과 신발을 신고 다시 예전처럼 일을 하게 했다. 황제는 오히려 장균에세 화를 내며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었다.
“이 자야말로 진짜 미친놈이 아닌가! 십상시 중에는 단 한명의 착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어사대부는 황제의 뜻을 받들어 장균이 황건도를 배운 바 있다고 무고해 수감시켰다. 장균은 옥중에서 매를 맞다 죽었다.
왕윤
황건적의 난이 한창일 때, 예주자사 왕윤(王允)이 황건적을 격파하고 적에게서 장양의 빈객이 황건적과 내통한 편지를 얻었다.
왕윤은 병주 태원(太原)군 출신으로 대를 이어 주와 군에서 관직을 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항상 경전을 읽고 암송하면서도 밤낮으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혔으며 지조가 굳고 뜻이 컸다. 같은 태원군 출신의 곽림종(郭林宗)이 항상 왕윤을 볼 때마다 기이하게 여겨 칭찬했다.
“왕윤은 하루를 천리를 가는 말에 비유할 수 있다. 왕을 보좌할 만한 인재이다.”
삼공이 함께 추천해 왕윤은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가,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예주자사로 특별히 선발되어 황보숭, 주전 등과 함께 황건적을 토벌하는 데 참가했다.
왕윤은 관직 생활 도중 아닌 일이 있으면 윗사람에게 얼굴을 붉히고 대들 정도로 성정이 강직했다. 게다가 환관들의 횡포를 극도로 미워했다. 그가 장양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증거를 잡았으니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황제에게 상주해 이 사실을 알렸다. 영제는 이 내용을 듣고 장양을 불러 매우 화를 내며 책망했다. 장양은 여러 번 머리를 땅바닥에 찧어가며 사죄해 간신히 죄를 면할 수 있었다. 죽음도 면치 못할 상황이었지만 영제로서는 굳이 장양을 제거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장양은 왕윤에게 원한을 품었다. 다른 일로 사안을 조작하여 왕윤을 중상모략했다. 황건적이 다 평정되고 난 다음 해, 왕윤은 채포되어 하옥되었다. 때마침 천하에 대사령이 내려 다시 자사 직에 복귀했으나 열흘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다른 죄로 체포령이 내렸다. 사도(司徒) 양사(楊賜)는 평소에 왕윤을 높게 평가하였으므로, 그가 고초와 치욕을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랫사람을 보내 위로의 뜻과 함께 미리 이 사실을 귀뜸해 주며 자결을 권유했다.
“그대는 장양의 일로 한 달 안에 두 번이나 처벌받게 되었소. 장양의 간특한 속셈은 헤아릴 수 없으니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나을 것이오.”
왕윤은 예주자사로 나가면서 순상(荀爽)과 공융(孔融)을 치중과 별가종사로 초빙했었다. 이들은 모두 당대의 명사들이었다. 순상과 공융 등 종사들과 호기 있고 결단력이 있는 주변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독약을 준비해 왕윤에게 갔다. 이들은 어차피 왕윤이 황문사옥에 투옥되면 고통은 고통대로 받고 온갖 치욕을 당한 후에 없는 죄를 자백하고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왕윤이 소리쳐 꾸짖었다.
“나는 신하된 자로서 군주에게 죄를 얻었으면, 당연히 엎드려 목 베임을 당해 천하에 사죄해야지 어찌 약을 먹고 죽는단 말인가!”
왕윤은 독이 든 잔을 던져 버리고 일어서서 제 발로 함거에 탔다. 사법을 담당하는 정위(廷尉)에게 이르렀을 때 주변에 그 사실이 다 알려졌다. 조정 중신들 중에 개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대장군 하진, 태위 원외, 사도 양사가 공동으로 상소해 왕윤을 극력 변호했다.
“공을 세워 상을 줘야 할 사람을 왜 죽이려 하십니까?”
바야흐로 환관과 사족 간의 정면 대결 양상이 벌어졌다. 영제가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왕윤은 죽음만은 면하게 되었다. 그해 겨울 대사령이 내렸지만, 왕윤만은 용서를 받지 못했다. 그 다음해에 이르러서야 겨우 석방될 수 있었다.
환관들의 횡포가 갈수록 심해져서 그들을 향해 눈만 흘겨도 죽음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왕윤은 환관들의 마수에서 벗어나려고 석방된 후 이름을 바꾸고 하내(河內)와 진류(陳留) 사이를 떠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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