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 마리 잠룡
1)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여남성 관아 뒷길에 소박한 수레 한 채가 섰다. 일산이 달린 고관용이 아닌 부녀들이 타고 다니는 사방이 막힌 수레였다. 조금 있더니 한 사내가 내렸다. 작은 키였지만 다부진 몸매에 동작이 가벼워 무술을 오래 연마한 것 같았다. 사내는 잠시 길을 찾더니 작은 골목으로 돌아 들어갔다. 사내는 골목 끝에 있는 한 작은 집 앞에 이르렀다. 오른쪽 문설주에 ‘허소’란 명패가 붙어 있었다. 여남월단평으로 유명한 인물감상가 허소의 집이었다.
사내는 문고리를 잡고 대문을 세 번 두드렸다. 한 작은 사내아이가 고개를 내밀자 사내는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패국 초현 사람 조조라 하오. 공조 어른을 뵈러 왔소.”
사내 아이가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지나자 조조는 내실로 안내되었다.
허소는 여남군의 공조였다. 군의 관리인 장사 주부 독우 공조 등은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지방관과는 달리 지방관인 태수가 임명하는 자리였다. 어찌보면 아전이라 볼 수 있었지만 여남군의 공조는 그리 만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후한의 관직임용제도는 천거제였다. 천거제란 춘추전국시대 이래 개별적인 인사추천에 의한 관직임용을 제도화한 것으로서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조정의 중신들이나 지방의 자사, 태수들에게 효렴(孝廉)이나 무재(茂才)1)로 추천을 받아야만 했다.
농공상에 종사하지 않고 오로지 관리가 되어 조정에 봉사하는 것을 천직으로 삼는 사대부의 입장에서는 관리로 임용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었다. 따라서 천거권을 행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사대부들은 자신을 천거해 준 사람을 평생의 스승으로 삼고 사제관계를 유지했다. 군사부일체의 시절, 사제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평생토록 운명을 함께 한다는 의미였다.
여남군은 수도 낙양이 위치한 하남군, 낙양 동남쪽의 영천군과 함께 후한말 사대부의 본고장이었다. 수도와 가깝다 보니 은퇴한 고관대족이나 명문가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이렇다 보니 군의 태수라 할지라도 1년에 한 명뿐인 관리의 천거가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만 공정치 않거나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인사가 있으면 이에 대한 비판여론이 따가웠다. 황실과 조정에 투서가 들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여남군에서 인사책임자인 공조가 된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천거제의 단점은 정실이 많이 개입한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혈연 지연 학맥 등 개인적인 친소관계가 작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정실에 의한 부적격자의 천거를 방지하기 위해서 천거자는 자신이 천거한 사람의 공과에 공동 책임을 지도록 했다. 천거를 받은 사람이 반역이나 부정을 저지르면 천거자도 같은 죄로 처벌받았다. 천거받은 자가 반역을 하면 추천한 자도 반역죄로 처벌받았다. 아무나 함부로 천거를 했다가는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었다. 인물을 보는 눈이 정확해야 했지만, 모든 사람이 이런 능력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이럴 때 사람을 잘 알아보는 탁월한 안목을 지닌 사람이 대신해서 관직후보자에 대해서 품평을 해준다면 상당히 부담을 덜어줄 수 있었다. 그래서 하나의 제도로서 자리 잡은 것이 인물평이었다. 자연스럽게 인물을 심사하고 평가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이들을 인물감상가 또는 인물품평가라 했다. 당시에 가장 이름 있는 인물감상가는 남양 사람 하옹과 여남 사람 허소였다.
특히 허소가 유명했는데 허소는 그의 사촌 형 허정과 함께 매월 인물들에 대한 짧은 평가를 모아 발표했다. 사람들은 이를 여남월단평이라 했다. 이들이 여남군에 거주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웬만한 인물은 아예 여남월단평의 평가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평가의 대상으로 다루어진다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었다. 여기서 호평이라도 받게 되면 사람의 값어치가 백배나 뛰었기 때문에 출사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허소에게 평가 한번 받아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명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허소가 인물 감상가로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그의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뛰어나기도 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공정하게 본대로만 말하고 격이 낮은 사람들은 아예 상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관직을 원하는 사대부들뿐 아니라 이미 현직에 있는 관료들조차 허소의 인물평을 중시하고 어려워했다.
원소가 복양2)현장으로 재임 중 모친상을 당해 낙양으로 귀경할 때의 일이었다. 원소는 이미 낭중에 임명되었다가 약관의 나이에 복양 현장으로 부임했었다. 원소는 사세삼공3)을 배출한 명문가의 종손으로 인물 잘났고 배짱 또한 두둑했으니 사대부 계급의 자제들 중에 따르는 이들이 구름처럼 많았다. 허소도 이런 원소를 평가하기를 장차 나라를 책임질 동량지재라 극찬한 바가 있었다.
원소가 복양에서 낙양으로 돌아올 때 주변의 수많은 인사들이 무리를 지어 그를 전송했다. 배웅나온 마차가 길게 늘어서 도로를 메울 지경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관내외의 인사들이 전별금으로 내어놓은 재물과 선물들을 실은 수레가 한참 뒤를 이었다. 원소는 상을 당한 사람이었다. 고결한 선비라면 비판하고 비판받아 마땅한 상황이었다.
일행이 여남 경내에 이르자 원소는 손님들과 작별을 고하고는 마부 하나만을 제외하고 다른 수행원들과 짐수레들은 다 멀리 길을 돌아서 가도록 했다. 여남에 사는 허소의 날카로운 필봉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에게 명망을 얻는 일에 많은 공을 들여온 원소로서는 허소의 비판적 평가에 그의 위명이 손상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 명망과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사세삼공의 명문가 출신 원소와 같은 사람도 허소의 붓끝을 심히 의식했다는 것이다.
조조는 야심이 있었다. 권력도 있는 집안이고 돈은 넘치도록 많았지만, 그에게는 가슴 속 깊은 열등감이 있었다. 내시의 양자의 아들.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좋게 보기 쉽지 않은 배경이었다. 양자의 아들도 제대로 인정받기 쉽지 않은 사회에서 모두의 지탄 대상인 내시의 양자의 아들까지 겸했으니 남들의 멸시와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조조가 소싯적에 더 야단스럽게 놀았었던 것도 이런 까닭 때문이기도 했다. 조조가 아무리 덕행을 쌓고 학업에 정진해도 당시의 주류사회인 사대부들에게 인정받기는 어차피 그른 일이었다.
그럴수록 조조는 더욱더 관직을 원했다. 한 고을의 수장으로 시작해 훌륭한 능력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서 한 군의 태수가 되어 누구보다도 더 잘 정사와 교화를 베풀어 자신을 업신여기던 선비들에게 보란 듯이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출발이 좋아야 했다. 게다가 이미 함께 어울려 놀던 원소나 장막 등도 이미 다 출사를 하지 않았던가. 조조는 은근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자기를 높게 평가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약관이 되어 출사할 나이가 되자 조조는 허소의 평가를 받고 싶었다. 여러 차례 사람들을 통해 청을 해 봤지만, 허소는 이 핑계 저 핑계로 조조를 만나려 들지 않았다. 평소에 조조의 행실에 대해 잘 알고 있기도 했거니와 그의 출신성분 자체가 허소에게는 탐탁치 않았을 것이다.
조조는 명문가 출신도 아니었고 심지어 사대부 출신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천출이나 빈한한 가문 출신도 아니었다. 오히려 떵떵거리는 세력가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조등은 환제 시절 중상시 대장추4)를 지낸 최고위직 환관이었다. 당시는 환관계급이 최고권력층이었다. 1, 2차 당고의 금을 거치면서 환관들이 외척과 사대부 연합세력을 완전히 궤멸시키고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영제 시절 국가의 권력은 중상시 장량을 비롯한 열 명의 중상시 즉 십상시들의 손아귀에 있었는데, 조등이 바로 장량의 전임자였다.
조등은 그 뿌리가 한나라의 건국공신 조참이라고 한다. 명확한 족보상의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등의 성이 조참과 같고 고향 역시 패국 초현이었으므로 그렇게 주장해도 아니라고 할 근거는 없다. 조등은 어려서 내시가 되어 궁궐에 들어갔으며, 여러 황제를 섬기면서 차차 지위가 올라가 최고위직 환관이 되었다. 그는 전임자인 조절과 왕보 등이 권력을 남용하고 횡포를 부렸던 것과는 달리, 신중한 성격에 업무에 밝아 실수가 없었으며 남을 중상모략하는 일이 없어서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좋은 평판을 얻었다 한다.특히 그는 사대부 중 장온, 장환 등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을 조정에 천거해 벼슬자리를 열어주었는데, 그에게 추천받은 자들 중 삼공구경5)의 고위직에 오른 자가 많았다.
조등은 당시 고위직 환관들의 전례에 따라 양자를 두어 대를 이었는데, 그의 양자 조숭이 조조의 아버지였다. 조숭은 원래 성이 하후씨였다 한다. 같은 패국 초현 출신의 한나라 개국공신 하후영의 후손이라 한다. 유방이 항성에서 항우에게 패하고 도망칠 때 아들과 딸이 함께 있었다. 유방은 항우군의 추격이 임박하자 마차가 무거워 따라잡힐 수 있다는 생각에 아들과 딸을 마차 밖으로 집어던지기를 여러 차례 했다. 그때마다 마차를 세우고 유방의 아들과 딸을 끝까지 지킨 마부가 바로 하후영이었다. 그때 던져졌던 아들이 유방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효혜제이다. 하후영이 대단한 개국공신이었던 것이다. 조참과 하후영 모두 쟁쟁한 개국공신의 가문이었으나, 후대는 몰락하여 사실 조숭이 하후영의 후손인지는 입증할 길은 없다.
조등은 조숭에게 비정후라는 열후의 지위뿐만 아니라 막대한 재산을 물려주었다. 이 막대한 재산은 훗날 별 능력도 없는 조숭이 관리 중 최고위직인 태위 벼슬을 시가의 2배인 1억만전을 주고 사는 밑천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조조의 가문은 권력과 부가 하늘을 찌를 듯한 신흥 벌열가문 출신이었다. 하지만 사대부 출신의 관료계급이 그토록 경멸하는 환관 가문 출신이었다. 사대부 명사를 자처하는 허소로서는 환관 출신의 자제에게 좋은 인물평을 해줬다가는 자신의 명성이 손상될 것을 우려했다.
둘째 조조의 평소의 행동거지가 문제였다. 인물평은 천거의 참고자료로 사용되는 것인데, 천거 대상은 효행이 뛰어나거나 학문이 빼어나거나 반듯한 성품으로 인망이 있어야 했다. 조조는 이 어느 것에도 두드러진 점이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방종함과 악행으로 명성이 높았다.
조조는 소년배의 우두머리였다. 소년배란 요즘 말로 치면 일진에 해당하거나 그 위의 건달, 조폭의 무리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사회계층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학업이나 생업에는 힘쓰지 않고 임협 방탕하게 놀고 심지어는 범죄나 악행도 서슴치 않았다. 소년배들은 전국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는데, 수도인 낙양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이름난 권세가와 명문세족이 즐비한 곳이다 보니 배경이 든든한 소년배들의 비중이 높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이들 중에는 명문의 자제로서 남을 이끌만한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지만, 글방에 틀어박혀 학업에 열중하거나 조신하게 품행이나 닦기에는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일시 방탕하게 노는 이들도 있었다. 원소, 원술, 장막, 포신, 허유, 오광, 오경 등이 다 이런 자들이었는데 협객 행세를 하면서 비슷한 부류를 모아 두목 노릇을 하면서 서로 경쟁도 하고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
조조도 이들 소년배의 우두머리들 중 하나로서 낙양에서 원소와 더불어 양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원소는 사세삼공을 지낸 당대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는 용모와 풍채가 뛰어나고 행동거지에 위엄이 있으면서도 아랫사람들에게도 예의 바르게 행동했으므로 많은 사대부 출신의 젊은이들이 따랐다. 가문이나 인물로 볼 때 조조는 도저히 원소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조는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다. 눈치가 빠르고 기민할뿐더러 권모술수에 뛰어났다.
조조는 어려서부터 교활하다고 할 정도로 명민했다. 그의 교활함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조조가 어려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만 좋아하고 학업에 열중하지 않자 그의 작은 아버지가 자주 조숭에게 일러바쳐 혼이 나게 하곤 했다. 이를 골치 아프게 생각한 조조는 어느 날 하루 꾀를 내었다. 길거리에서 잘 놀던 조조는 그의 숙부가 나타나자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숙부가 무슨 일인지 묻자 조조가 말했다.
“갑자기 풍을 맞았습니다.”
큰일 났다고 생각한 숙부는 서둘러 조숭의 집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조숭이 깜짝 놀라 뛰어나와 보니 조조가 멀쩡한 얼굴로 태연자약하게 놀고 있었다.
“풍을 맞았다더니 그새 다 나은 것이냐?”
조숭이 황급히 묻자 조조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풍은 무슨 풍입니까? 평소에 작은아버지가 저를 싫어하시니까 없는 일도 지어내어 말하신다니까요.”
이후로 조숭은 동생이 조조에 대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았다. 어린 조조가 맘대로 놀아도 제재하는 이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어린 시절에도 꾀가 이 정도였으니 나이가 들수록 더욱 술수가 교묘해지고 영악해진 것은 불문가지였다.
조조는 학업에는 관심이 없고 협객 행세를 하면서 패거리를 모아 방탕하게 놀기를 좋아했다. 매를 날리고 사냥개를 달려 사냥과 도박을 즐겼고, 여염집과 주루를 드나들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다.
조조는 비록 볼품없는 외모에 사람들이 경멸하는 환관 가문 출신이었지만, 그의 과단성과 뛰어난 지략으로 건달패거리들 사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조조는 사람의 심리를 정확히 읽고 이를 이용할 줄 알았고, 배짱이 두둑하고 기회 포착에 기민했다.
조조는 원소와도 어울려 놀면서 악행이든 선행이든 지질 않았다. 한번은 조조가 원소와 함께 놀러 나갔다가 마침 어떤 집에서 혼사를 치루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 두 사람은 장난기가 발동해 신부를 납치하기로 했다. 두 악동은 한참 신혼을 치루고 있는 혼주의 집에 몰래 잠입 했다. 한밤중이 되자 조조가 큰 소리로 외쳤다.
“도둑이야! 도둑이야!”
초가집 안에 모여 있던 집안사람과 하객들이 모두 밖을 살피러 나간 사이 조조는 원소와 함께 신방에 뛰어들어가 칼을 뽑아 신부를 위협해 둘러메고 나왔다. 사람들을 피해 도망쳐 나오던 중에 원소가 발을 헛디뎌 탱자나무 덤불 속으로 쓰러졌다. 가시나무에 얽힌 원소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멀뚱히 조조만 바라보았다. 신부를 들쳐 맨 조조로서는 원소를 구할 방도가 없었다. 조조는 신부를 찾아 나온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그 도적놈이 있소!”
깜짝 놀란 원소는 황급히 뛰어올라 가시덤불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무사히 도망쳤다.
원소는 겉모습만 그럴 듯했지 결단력이 없었고, 꾀를 내기는 좋아하나 실행력이 없었으며, 내심으론 혼자만 잘나서 남들이 자기보다 잘난 꼴을 못 보았기 때문에 남의 좋은 의견을 진심으로 경청하지 않았다. 점차 원소보다 조조를 더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조조의 주변에 더 많은 소년배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조조를 재평가하기 시작한 사람들 중 하나가 장막이었다. 장막도 명문가의 자제로서 젊어서 협기로 유명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장막은 원소하고도 절친했으나 마음으로는 조조를 더 높이 평가했다.
점차 조조가 더 큰 명망을 얻게 되자 원소는 조조를 몹시 질시했다. 급기야 원소는 사람을 매수해 조조를 처치하고자 했다.
자객이 조조의 집에 몰래 숨어들어와 침상에 누워있는 조조를 향해 비수를 날렸다. 다행히 조금 낮게 날아와 칼날이 침상에 꽂혔다. 조조가 이번에는 칼이 조금 높게 날아올 것으로 직감하고 침상 위에 납작 엎드렸다. 과연 단검은 조조의 옷깃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조조는 이처럼 기지를 이용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붙잡힌 자객은 원소가 보낸 사람임이 밝혀졌으나 조조는 불문에 부쳤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는 법이다. 이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에게는 다 알려졌다. 사람들은 조조의 기민함과 대범함을 칭찬했다. 이로 인해 원소는 속좁음과 용렬함만이 드러나게 되었다.
허소의 집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평소에 집주인의 검소한 생활을 보여주듯 특별히 꾸미거나 장식하지도 않았다. 한식 경이나 앉아서 기다리자 드디어 허소가 나타났다. 선비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흰색 학창의를 입고 머리에는 두건만 썼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이나 됐을까 싶었지만, 안색이 맑고 단정해 학과 같은 풍모가 있었다.
상견례를 마치고 나서 두 사람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채 한동안 서로를 아무 말도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허소는 감정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마뜩치 않은 표정이었다.
조조가 먼저 몸을 낮추었다.
“교공의 가르침을 받아 찾아왔습니다. 삼가 가르침을 원합니다.”
조조는 태위 교현의 추천을 받고 찾아왔음을 밝혔다.
당시 조정의 최고위직에 있던 태위 교현은 조조의 집안과는 세교가 있는 사이였다. 명문 사대부인 교현이 환관 가문과 친교를 맺게 된 것은 조조의 할아버지 조등이 두루 사대부들에게 은덕을 베풀어주었던 때문이었다. 조조는 어린 시절부터 교현의 집에 드나들면서 가깝게 지냈다. 교현은 한때 유명한 인물품평가였다.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났다. 그는 한눈에 조조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았다.
하루는 교현이 조조에게 은밀하게 말했다.
“장차 천하가 어지러워질 것인데 정말로 뛰어난 인재가 아니면 세상을 구해 낼 수 없을 것이네. 이를 능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자네뿐일세.”
또 한 번은 이런 말도 했었다.
“내가 지금까지 천하의 명사를 많이 보아왔지만, 자네만한 인물이 없네. 나는 이미 늙었으니 앞으로 내 처자식을 자네에게 부탁하겠네.”
교현은 조조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 명성임을 알아차렸다.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유명한 인물감상가로부터 좋은 품평을 받는 일이 필요했다. 하지만 현직 최고위직에 있는 자신이 직접 조조를 인물됨을 평가한다면 공정성 문제가 제기될 것이 분명했다. 교현은 조조에게 허소와 친교를 맺을 것을 권유했다. 허소가 조조의 숨은 재능을 알아봐 공식적으로 발표해 준다면 조조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달라지리라는 것이 교현의 생각이었다.
조조가 값비싼 선물을 보내고 겸손한 자세로 서로 친교를 맺기를 신청했으나 허소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조조같이 악평을 듣는 사람과 어울린다면 자신의 명성에 손상이 갈 것을 우려했다. 허소는 조조에 대해서 들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기이한 재주가 있지만 출신성분이 너무 나빴다. 게다가 행실도 조신하지 않고 제멋대로였다. 그에 대한 인물평을 한다는 자체가 자신에 대한 사족들의 인망을 해할 수 있었다.
오기가 난 조조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허소의 약점을 잡아 협박을 했다. 조조는 정보력이 뛰어난 암흑세계의 인물이기도 했다. 한편으론 조조에 대한 인물평을 해주었으면 하는 태위 교현의 지긋한 압력이 있었다. 일개 군의 인사담당자로서 지금으로 치면 총리급의 인사가 부탁하는데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무엇이 알고 싶소?”
마지 못해 허소가 입을 열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오(治世之能臣,亂世之奸雄).”
허소가 내뱄듯이 말했다.
“하하하하.”
조조가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나왔다.
다음 달 허소의 월단평이 낙양의 화제가 되었다. 비록 뉘앙스는 애매했지만 조조에 대한 허소의 평가는 낙양의 벼슬아치와 사대부들이 모두 놀라워하기에 충분했다. 품행이 나쁘고 경박스럽기로 유명한 조조가 치세의 능신감이라니.
이로 인해 고위 관료들의 조조에 대한 인식은 크게 일신되었다.
교현의 은밀한 권유도 있었지만, 허소의 인물평에 힘입어 상서우승 사마방6)이 조조를 천거했다. 상서우승은 황제의 비서실 부실장쯤 되는 자리였으므로 그의 추천은 단번에 효력을 발휘했다.
조조는 낙양령 자리를 강력하게 희망했다. 수도 서울의 행정책임을 맡아 한번 멋들어지게 능력을 발휘해 자신을 멸시해온 사람들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발령과정에서 조정의 인사책임자인 선부상서 양곡7)이 조조가 출신이 나쁘고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끝까지 반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사마방이 중재하여 낙양 북부위로 임명되었다.
사마방의 생각에 낙양북부위는 조조에게 딱 맞는 자리였다. 낙양북부위는 낙양 북쪽의 치안책임자였다. 낙양 북부는 황궁이 관할 구역 내에 있었다. 궁중의 권세가들과 그들의 친척들이 많이 살았다. 특히 정권을 농단하고 있는 고위직 환관들의 사저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었다. 권세가들과 그 집안사람들은 모두 안하무인이었고 아무렇지도 않게 법을 어겼다. 한편으론 천자가 거주하는 구역이니만큼 어느 곳보다도 법령이 엄격하게 지켜져야 했다. 낙양 북부위는 금령을 지키지 못하면 큰 벌을 받았고, 제대로 시행하자면 권력자들의 반발로 자리를 부지하기 어려웠다. 권력을 쥐고 있는 내시들에게 한번 잘 못 찍혔다간 벼슬자리는 고사하고 졸지에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는 터였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골치 아픈 자리이다 보니 누구도 그 자리에 임명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조조는 환관, 그 중에서도 최고 우두머리인 중상시의 집안사람이니 ‘너희들끼리 한번 잘해 봐라’ 라는 것이 사대부 출신의 관료들의 태도였을 수도 있다.
부임한 지 한 달도 안 돼 조조는 낙양을 발칵 뒤집어놓는 대형 사건을 터뜨렸다. 당시 최고의 권력가, 십상시 중 하나였던 소황문 건석의 숙부를 몽둥이질을 해 때려죽인 일이었다.
도성에서는 통금제도가 실시되었는데 밤 이경이 지나면 아무도 거리를 나다닐 수 없었다. 조조는 밤이 되면 북부위 관할 구역 곳곳에 관문을 설치하고 관문 위에는 오방색을 칠한 곤봉을 좌우 다섯 개씩 걸어 놓았다. 그리고는 관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통금을 어기는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곤장을 치도록 엄히 명했다. 삼경에 통금 위반이 적발되면 곤장 삼십 대였다.
하루는 밤늦게 술에 취해 코가 비틀어진 건석의 삼촌이 조조가 지키는 관문 앞에 나타났다. 주루에서 늦게까지 계집을 끼고 놀다 온 모양이었다. 눈에 뵈는 게 없는 건석의 삼촌은 양팔을 붙잡는 병사들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놔라. 이놈들아. 내가 누군질 알기나 하느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건석이 아재비다. 이놈들. 알았으면 어서 꿇어라.”
조조가 추상같은 목소리로 명했다. 손에 쥔 칼을 금방이라도 빼어들 기세였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저놈을 형틀에 묶어라.”
형틀에 묶인 건석의 삼촌이 버둥거렸다. 무어라 고함을 치고 있었지만 재갈이 물려 들리지 않았다.
“매우 쳐라. 조금도 손속을 봐주어선 아니 된다.”
곤봉이 스무 번 넘게 허공에서 춤을 추자, 옷이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선혈이 낭자했다. 형틀에 묶인 자는 몇 번 크게 버들적거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숨이 끊어진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조야가 발칵 뒤집혔다. 새파란 벼슬아치가 건석의 삼촌을 몽둥이로 때려죽인 것이었다. 건석이 누구인가. 영제 초기 외척인 대장군 두무와 사족들의 중망을 받는 승상 진번이 환관들을 숙청하려 했을 때 중상시 왕보, 조절과 더불어 궁정쿠데타를 일으켜 이들을 주살한 장본인이었다. 건석은 비록 환관이었지만 건장한 체격에 무략이 있었으므로 직접 병력을 지휘해 두무와 진번을 체포했었다.
그러나 어찌할 수는 없었다. 조조는 금령을 지켰고, 법 위반자를 법대로 처리했을 뿐이었다. 서슬 퍼런 환관들도 드러내 놓고 문제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조조가 그들의 대선배인 중상시 조등의 금쪽같은 손자였기 때문이었다. 중상시의 손자가 중상시의 삼촌을 때려죽인 사건은 그래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이 일이 있은 뒤로는 수도의 치안이 좋아졌고 밤에 금령을 어기고 나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없어졌다. 이로인해 조조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고관대작들과 환관들은 여러 가지로 불편해졌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슬그머니 발령이 났다. 조조는 현령으로 승진했다. 발령지는 연주에 있는 돈구 현이었다. 좌천성 승진이었던 셈이었다.
때는 희평3년(서기 174년), 한고조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하고 한나라를 건국한 지 삼백 팔십여 년, 후한 광무제 유수가 왕망의 난으로 망한 한나라를 다시 세운 지 약 백오십 년이 지난 때였다.
1) 효렴은 군 태수가, 무재는 주의 자사가 일 년에 한 명씩만 천거할 수 있다. 효렴이나 무재로 천거되면 삼공부 등 중앙부처에 초빙받거나 칙임관이 되어 현령 등 지방수령으로 나갈 수 있었다. 무재는 원래 이름이 수재(秀才)였는데 후한 시절에는 광무제 유수(劉秀)의 이름을 피휘해 명칭을 변경했다.
2) 연주 진류 군 내의 현 이름
중상시(中常侍)는 환관들의 우두머리로서 구경(九卿)에 준하는 비이천석급(比二千石) 급 직책이었다. 황제를 늘 좌우에서 시위하며 내궁(內宮)에 까지 따라 다니며 궁궐 내의 여러 일을 관장했으며 황제의 업무상의 질문에 대답하는 등 자문 역할도 함께 수행했다. 환관들이 정권을 장악한 후한시대 후반부에는 실세 중의 실세였다.
3)대장추(大長秋)는 중상시 급의 고위 환관이 담당하는 직책 중 하나로서 황후의 출입 시 늘 수행하며 종친들에게 하사품을 지급하고 황후를 알현하게 하는 일을 관장했으며 황후의 명을 받들어 실행에 옮기는 임무를 맡았다. 후한시절 황후가 태후가 되어 섭정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므로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장쯤 되는 역할을 수행했다.
4) 삼공은 재상급인 태위, 사도, 사공을 말하며, 구경은 태상, 광록훈, 위위, 태복, 정위, 대홍려, 종정, 대사농, 소부 등 9명의 중앙정부 장관급 고위관료이다.
사세삼공이란 네 대에 걸쳐 삼공(태위, 사도, 사공)의 벼슬을 배출했다는 뜻으로 원소의 가문이 대단한 명문가였음을 알 수 있다. 원소의 고조부 원안(袁安)은 후한 장제(章帝) 시절에 사도(司徒)를 지냈고, 종증조부 원창(袁敞)은 사공(司空)을 역임했으며, 조부 원탕(袁湯)은 태위(太尉)를 지냈다. 원탕은 원평(袁平), 원성(袁成), 원봉(袁逢), 원외(袁隗) 등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원평과 원성은 일찍 죽었으나 원봉과 원외는 다 삼공 벼슬을 지냈다. 원소는 원래 원봉의 서자로 적자인 원술의 배다른 형이었으나 원성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원성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당시 관직임용절차는 천거제(薦擧制)였다. 삼공을 지낸 사람들은 천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으므로 수많은 친인척이나 문생고리들을 관직에 진출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관직에 출사한 관리는 평생 천거해 준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절대적으로 충성했다. 사세삼공을 배출한 가문은 전국에 추종하는 수많은 피후견인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6) 사마의의 부친으로 명망이 높은 사대부 출신 관료
7)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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