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최초 나비 박사 석주명

 

석주명(1908~1950.10)은 한국의 나비 연구로서 국민들이 붙여준 최초 나비 박사다.



그의 나비 연구 일생과, 국민나비 박사가 된 사연을 풀어보기로 한다.
석주명은 1908년 11월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19세가 되던 해 개성의 송도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농학과에 입학했다.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생활은 그럭저럭 즐거웠다. 교과 과목 중에 가장 흥미로운 과목은 생물학이었다.
생물학을 좋아하게 된 것은 생물 선생님이, 뭘 암기 하라, 어느 부분을 더 복습하라는 말은 전혀 없고, 집념의 의지를 가져라, 티끌만한 것도 유심히 관찰하라는 말로 강의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생물 선생님은 파브르의 이야기를 많이 알려 주었다.
“생물학은 암기하는 학문이 아니죠. 파브르처럼 하찮은 매미를 보고도, 매미는 귀머거리 곤충이란 걸 알아내듯이, 관찰 하는 학문이요, 무엇을 관찰할 때는 끝을 보려는 집념의 학 문이 곧 생물학인 것입니다.”
옆의 학생은 코를 드르렁 골았다. 아마 그 학생은 생물학이 어지간히도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석주명만은 생물 선생님의 수업 시간이 제일 즐거웠다.
석주명의 책꽂이에는 파브르에 관한 책들이 여러 권 꽂혀 있었다. 어쩌다가 파브르에 관한 새로운 책이나 논문집을 구하게 되면, 그날 밤은 그걸 읽느라고 꼬박 날밤을 새기가 일쑤였다. 그리고는 의문 나는 사항들을 낱낱이 적어두었다가 그 다음날 생물 선생님을 찾아가 질문하여 의문을 푸는 것이었다.
그런 기특한 자세에 탄복한 생물 선생님은 석주명에 대해서는 일본 학생들보다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생물 선생님은 석주명을 개별적으로 만날 때마다.
“석주명 학생, 정말 훌륭하구나.”
라는 격려와 함께 우장춘의 화제를 꼭 꺼내곤 했다.
“우장춘 씨는 분명히 한국인이시다. 그런데도 일본에서 없어선 안 될 장래가 촉망되는 육종 연구가이시다. 지금은 비록 농림성 농사 시험장에서 고용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곧 박사 학위를 받고도 남을 거야.”
생물 선생님으로부터 우장춘 아저씨의 자랑을 전해들을 때마다 당장 만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가고시마에서 우장춘 아저씨가 계신 농사 시험장까지의 교통편이란 복잡하고 멀기만 하여 마음만 앞섰지 행동은 한 번도 옮겨보지 못했다.
어느 날, 소낙비가 쏟아지던 여름, 우장춘 아저씨의 얼굴을 상상해보다가, 문득 까치와 맹꽁이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맞았어. 난, 바로 그것, 까치와 맹꽁이를 연구해볼테야.”
석주명은 학교를 졸업하여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까치와 맹꽁이를 연구하여 유명한 생물학자가 되겠노라는 결심을 해 본다.
사실 까치와 맹꽁이는 한국 땅이 아니면 쉽사리 볼 수 없는 동물이다. 석주명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929년 말이었다.
이 무렵 11월 3일 한국의 사회는 광주와 나주간의 통학 열차에서 한·일 학생 간에 충돌로 빚어진 광주학생운동사건으로 전국은 성난 벌통이었다.
석주명은 귀국하여 곧 모교인 송도중학교의 교원으로 취임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석주명이 택한 교육 과목은 일본에서의 결심처럼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엉뚱하게도 곤충학이었다.
곤충학 중에서도 나비를 그 대상으로 선택했다. 이점에 대해서 석주명의 주위 사람들은 많은 의문을 던졌다.
“일본에서 공부할 때는 한국의 고유한 동물이나 다름없는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해 보겠다 하고선 엉뚱하게도 나비만을 쫓아다니느냐? 나비에 무슨 현상금이라도 붙어 있느냐?”
석주명이가 연구 대상을 까치나 맹꽁이에서 나비로 바꾼 것에 대하여 별의별 의문들이 난무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그냥 조사할 일이 있어서 나비를 찾아다닌다.”
라고, 대답하곤 했었다.
사실, 맨 처음 연구 의욕은 희귀종이나 다름없는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려 했으나, 막상 귀국해서 보니 그걸 연구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첫째는 그것들이 희귀종이라는 점, 다시 말해서 희귀종이니 만큼 연구 대상을 크게 잡았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것을 연구하기에는 생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현실 때문이었다.
아무튼 석주명은 연구 대상을 나비로 선택한 이상 누가 뭐라고 하던 나비를 찾아 나섰고, 그걸 채집하는 데만 열중 했다.
석주명이 나비를 채집하러 나설 때 차려 입은 채집 복장은 흡사 각설이와도 같았다. 얼굴의 햇볕 그을음을 막기 위하여 안경만 남겨 놓고 푹 눌러 쓴 낡은 중절모자의 모습 하며, 나비 한 두 마리씩 갇혀 있는 수십 개의 채집 주머니를 주렁주렁 허리에 찬 모습하며, 궁둥이까지 축 늘어지게 맨 배낭의 모습이 그러했다.
그런 모습을 하고 나타나면 어느 누구고 그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숫제 석주명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거지야, 거지야, 나비 잡아서 뭐하냐?”
하며 놀려 댔다. 나비를 채집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팽나무 끝에 앉은 왕오색나비를 잡으려다가, 나무 가지가 꺾어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생명까지 잃을 뻔 했다. 절벽에 딱 붙어 있는 남방노랑나비를 잡으려다 추락하여 다리에 골절상을 입 은 일, 한 마리의 나비를 쫓다가 그만 심심산중에 갇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던 일,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일 등 나비를 채집하려다가 당한 위험했던 고비는 수없이 많았다.
그렇게 해서 나비를 잡을 때마다 석주명은 괴성에 가까운 감탄을 연발하곤 했었다.
“오! 예쁜 나비! 이런 나비가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니, 정말 놀랍군!”
석주명은 나비를 연구하기 시작한 지 꼭 삼년만인 1933년 이윽고 『개성지방의 접류(蝶類)와 조선산 접류의 미기록종』등 논문을 조선박물학회지 15호에 발표함으로써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 이후로도 석주명은 나비에 관한 연구 논문을 쉬지 않고 발표했다. 석주명의 그런 논문을 접한 생물학의 식자들은 그를 이미 ‘나비 박사’라고 호칭했다.
과거 유전학의 토대를 세워 유명해진 그레골 멘델도 한 중학교의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학교 안의 조그만 뜰을 이용 하여 완두콩을 심어 실험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불후의 업적으로 평가되는 ‘멘델의 유전법칙’을 결실 맺었듯이, 석주명도 일제강점기 시골 중학교에서 어려운 환경을 인내하며 여가를 틈타 산과 들 또는 강변을 헤매며 나비를 채집하고 연구한 결과가 마침내 나비 박사로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석주명의 방 천정은 온통 채집한 나비가 담아진 종이 봉지만이 대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종이 봉지마다 나비를 채집한 날짜와 장소 등이 기재되어 있었는데, 석주명의 방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를 한약방 한의사로 착각하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석주명의 나비 연구는 보다 심층 깊이 다루어졌고, 그것에 대하여 몰입하려는 욕심과 외곬성은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석주명은 나비를 찾아 전국을 안 다녀 본 곳이 없었다.
학문적 대상이랄 수 있는 나비의 서식처를 찾아 전국을 누비다 보면 전혀 본 적이 없는 나비들을 채집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석주명은 그것에 대한 이름을 붙여주느라고 고심한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흑백알락나비’의 학명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 학명인 ‘Hestine Japonica seoki shirozu’의 ‘Seoki’는 석주명의 성(姓)인 ‘석’의 영문 표기인데, 이름 없는 나비를 채집하여 학명을 붙일 경우가 생길 때마다. 석주명은 그런 표기법을 자주 이용하였다.
석주명의 나비에 대한 광적인 연구 소식이 세계 곤충학계에까지 퍼져 그 공로가 인정되어 급기야는 1941년 왕립아세아학회로부터 적극적인 보조금의 협조를 받아 한국산 나비 목록이라고 할 수 있는 영문판 《조선접류목록(朝鮮蝶類目錄)》을 발간하게 된다.
석주명의 나비 연구 중에서 특히 나비의 개체변이 연구는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었는데 그 중 『조선산 배추흰나비의 앞날개의 변이』 논문은 일본의 곤충학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나비를 사랑했던 석주명은 나비라는 어휘의 생성 과정을 찾아 <나뵈- 두시언해(杜詩諺解)>, <남이 -시몽 언해물명(詩蒙諺解物名)> 등 한글의 변천사를 발표, 나비 연구가다운 진면목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나비 연구를 한다는 일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지경이었으나, 석주명은 그 일에 대하여 한 번도 좌절 하거나, 게을리해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고, 연구 생활을 위해서는 적어도 연구 실험을 해나갈 수 있을 만한 장소와 소요 시설, 연구에 필요한 연구비, 연구를 도와주는 조력자 등 세 가지의 기본 조건이 갖추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석주명은 그런 조건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나비에 대해서만은 세계인이 우러러 보는 최고의 연구가라는 위치를 확보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석주명은 나비 연구 외에도 만돌린 연주에 있어서 그 솜씨가 뛰어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나만큼 수준 높은 만돌린 연주가는 없다.”
라고 할 정도로 그 자부심 또한 대단하였다.
나비를 채집하러 전국을 누비고 누빈 또 다른 결실로 얻어진 것이 있다면 《제주도 방언집》이었다. 나비 연구가인 석주명이가 난데없이 《제주도 방언집》이란 책을 발간하자 국문학계의 많은 학자들은 풀이 죽어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그런가하면 세계 각국의 나비의 이름을 조사하여 후학들을 경탄케 하였는데, 그 중 몇 개를 소개해보면 〈쵸- 일본〉, 〈후례 - 중국〉, 〈엘베테 - 몽고〉, 〈빠뽀추카 - 소련〉, 〈슈멧텔링케 - 독일〉, 〈버터플라이 – 미국) 등이다.
석주명은 송도중학교 재직 12년간 나비에 관한 연구 논문 79편을 발표하고 나서, 경성제국대학 부속 제주도 생약연구소 소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광복 이후에는 농사시험장 병리곤충학 부장으로 재임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 그러니까 1950년 3월 우장춘 박사가 귀국하여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 인사를 하였다.
“박사님, 이렇게 귀국해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석주명의 그런 첫 인사에 우장춘 박사는 반색을 하며
“오, 석주명 선생. 이야기 많이 들었소, 나비 연구가라는...”
석주명을 껴안은 우장춘은
“훌륭해요, 정말 훌륭한 학자예요.”
하며, 석주명이 1937년 일본 《곤충계》라는 학회지 5호에 발표한 바 있는 『다물리의 접류(蝶類)·완도의 접류』 논문을 관심 있게 읽었노라고 전하는 것이었다.
“네에? 박사님께서 소생의 그런 졸 논문을 읽으시고, 지금 까지 기억하시다니.”
석주명으로선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석주명과 우장춘의 그 만남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고 말았는데, 까닭은 그 뒤 얼마 후에 터진 6·25 전쟁 때문이었다.
1950년 10월 6일 낮에 서울의 거리에서 의문의 총격을 맞고 마흔 셋 나이로 사망하였다.
서울 수복전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버린 국립박물과학관의 재건을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하러 부지런히 가던 중이었다.
이날도 평소처럼 즐겨 입던 나비 채집 조끼를 걸치고 있었으니 군인은 이런 복장을 보고 인민군으로 오인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깡마른 체구에 얼굴까지 새까맣게 타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저기 인민군 소좌가 간다!”
군인이 달려가서 석주명을 붙잡아 심문 했다. “뭐 하는 사람이냐?” “나비 연구가요.” “그런 직업이 어딨어! 응, 암호로군!”
“암호가 아니고 직업이오.”
“그럼 이름은 뭣이냐?
“석주명이오.”
“응 두목 맞네! 소좌명”
군인은 ‘석주’를 ‘소좌’로 알아들었던 것이다. 군인은 그 자리에서 석주명을 쏴 죽이고 빨갱이 두목을 잡아 죽였다면서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석주명의 시신은 가마니로 싸서 개천에 버렸다.
동족 전쟁의 어처구니없는 비극이었다. 이때 죽지만 않았어도 석주명은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을 것이다.
한국에서 서식하는 나비 2백50여 종 가운데 석주명의 손을 거쳐 분류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의 나비에 대한 학자적 애정은 나비 박사라는 별명으로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파브르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관위에는 생전에 연구하고 아끼던 수많은 곤충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듯 날아왔다고 전해지듯이, 석주명이 세상을 떠나자 수백 마리의 나비들조차 유택에 날아 들어와 슬퍼했다고 한다.
석주명은 비록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지 못했지만 국민이 불러준 최초의 ‘나비 박사’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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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정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