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최초 의사 서재필
서재필(1864.1~1952.1)하면 독립문 또는 《독립신문》이 떠오르지만, 더 오래된 기록은 한국인 최초로 의사였다는 점이다.
서재필은 1888년에 미국의 라파에트 대학, 1889년 워싱턴 대학에서 세균학을 전공하고 당당히 의사 자격을 취득한 한국인 최초의 서양의사가 되었다.
항간에 서재필보다 앞서 1880년 5월부터 9월까지 약 4개월 동안 미국을 방문하여 서양의학 교육 받았던 지석영(池錫永)을 최초의 의사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잘 못된 것이다. 모든 자격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즉 전문 교육기관에서 소정의 과목을 이수하고, 시험 또는 실습・면접 같은 심사를 거쳐, 정당한 기관이나 단체로부터 졸업장 또는 자격증 같은 증서를 받고, 그들의 단체・협회를 구성하여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지석영은 그런 조건과는 무관하게 요즘말로 표현한다면 의료 선진지 견학 연수생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서재필은 처음부터 의사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파란만장한 운명이 의사를 만들었다.
그럼 무엇이 파란만장했는지 그의 일대기와 의사가 된 과정을 알아보기로 한다.
서재필은 고종 3년 1866년 10월 28일 전남 보성에서 보성군수 서광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야말로 명문 명가의 금수저 아들이었다.
그는 일곱 살 때부터 서울에 올라와 판사의 지위로 있는 외삼촌 김성근 댁에서 공부를 하였다. 외삼촌댁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개화기의 정치인 김옥균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김옥균은 나이 열 한두 살밖에 안된 어린 서재필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줄줄 외는가 하면, 열세 살 때는 임시로 보는 과거 시험인 전강(殿講)에서 장원하는 것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김판서, 재필이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총명한 아이오. 재필이를 보니 이 나라 조선도 머지않아 개화의 꿈이 이루 어질 것만 같소이다.”
“무슨 과찬의 말씀을.”
“과찬이 아니라 사실이오.”
“난 재필이를 어서 성장시켜서 나의 동지를 만들겠소이다.”
이렇듯, 김옥균은 외삼촌인 김성근보다도 서재필을 더 사랑하고, 장래에 대한 기대에 대해서도 남달리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러다 보니 서재필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김옥균이 주장 하는 개화의 사조에 동조하게 되고 급기야는 개화파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는 위치까지 가게 된다.
개화에 관심을 둔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일행은 개화에 대한 의논할 일이 생길 때마다 주위의 눈길도 피할 겸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인적이 드문 한가한 곳을 찾아다니곤 했었는데, 어느 날은 그 장소를 봉원사로 정한 적이 있었다.
봉원사에 닿은 김옥균 일행은 스님의 안내를 받아 조용한 승방에 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한창 나누는데 스님으로부터 이상한 청을 받게 된다.
“외람된 말씀 같지만, 잠깐 방을 다른 곳으로 옮길까요?”
“꼭 옮길 까닭이라도 있소이까?”
“소승이 신기한 것을 보여드릴게 있습니다.”
김옥균의 일행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난처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쪽 구석지에서 잠자코 이야기만을 듣고 있던 스님이 난데없이 끼어들더니만 방을 옮기자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잖은가.
이때 서재필이 나서서 난처한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남의 청을 안받아주거나, 무시한 처사도 결국은 개화사상에 위배되니 스님의 청을 들어주도록 합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스님은 자기의 청을 들어준 데 대하여 고맙다는 듯이 합장의 예의를 갖추고 나서 김옥균의 일행을 절 뒤에 있는 으슥한 방으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이상한 상자 하나를 꺼내더니만 일행에게 그 안을 들여다보라고 권한다. 맨 먼저 그 상자를 들여다 본 김옥 균은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고 만다.
그 안에는 김옥균으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사진들이 요지경처럼 들어 있었기 때 문이다.
“서양은 이러는데 조선은 뭐야.”
스님은 친절하게도 사진 설명까지 곁들여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영국의 런던이요, 이것은 포르투갈의 군대랍니
다.”
김옥균의 일행은 번갈아가면서 상자 안의 사진들을 처음 본 것도 신기했지만,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된 영국의 런던이며, 포르투갈 군대의 모습에서는 분노마저 치밀 지경이었다.
“스님의 정체는 무엇이오?”
서재필은 그 이상한 상자 속의 사진을 보여준 스님의 저의가 궁금하여 질문인 듯 추궁인 듯 거친 탁음을 내뱉었다. 그러자, 스님은 염주 알을 손바닥 사이에 정중히 낀 합장예의를 보여주고 나서 자신의 신분을 침착하게 밝히는 것 이었다.
“소승은 부산의 통도사에서 불경을 외는 이동원 이라는 사람입니다. 일찍이 일본말을 배워서 일본을 몇 번 다녀온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 일본은 서양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뒤떨어진 자기 나라 문명을 채우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 일본의 실태를 보고 우리 조선도 하루 바삐 서양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소신을 밝혔더니, 오랑캐가 아니냐면서 잡아가두려는 통에 이 절까지 피신을 왔습니다.”
그제야 서재필을 비롯한 김옥균 일행은 그 스님에 대 해서 안심을 하고 오히려 조선을 개화하는 데 좋은 묘안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날 이후부터 서재필은 조선의 개화에 대해서만은 김옥균과 더불어 더욱 신들린 열정을 갖게 되었다. 개화가 되지 않으면 조선은 언젠가는 제2의 임진왜란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
김옥균의 개혁의지, 서재필과 김옥균과의 인연, 이런 관계들은 마침내 우리 역사상 3일천하라는 갑신정변으로 이어지고 만다.
여기서 서재필의 운명을 바꿔버린 갑신정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884년 10월 17일은 우리나라 처음으로 세워진 통신관청인 우정국(郵政局)의 낙성식 날이었다.
이 행사를 틈타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박영효는 비밀리에 개혁 혁명을 시도하기로 했다.
우정국 총판 홍영식이 베푼 이 연회석에는 미국 공사, 영국 공사 등 외국 사절 20여 명과 함께 공교롭게도 개화파 주동자 김옥균을 포함한 일행과, 그것을 반대하고 청나라를 대국으로 섬겨야 한다고 고집하는 수구파의 민영기, 한규직, 이조연 등이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이날 낙성식의 연회는 오후 6시를 넘기면서 부터 그 흥이 한층 돋기 시작했다.
이 흥의 여세를 타고 김옥균은 옆자리의 일본 공사관 시마무라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건다.
“시마무라 공사관, 천(千)을 아시오?”
그러자, 시마무라 공사는 손에 든 술잔을 비우면서
“요로시(좋아)!” 하고 큰 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김옥균과 시마무라 공사관이 주고받은 ‘천’과 ‘요로시’, 그것은 개화파와 일본 사이에 사전에 약속된 이날 행사 도중에 무슨 일인가를 실행하기 위한 모종의 암호였다.
물론 이런 사실들에 대해서는 국정의 청나라에 의존한 민왕비의 수구파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연회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우정국 북쪽 창문에서 난데없이 큰 소리가 들렸다.
“불이야!”
귀청을 때리며 들려왔다. 이 바람에 연회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놀란 민영익은 방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이어 한규직이 나가려고 하는데 앞서 나갔던 민영익이 개화파와 밀약된 일본군의 칼에 찔려 방문을 향해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지는 것이었다.
수구파가 하나 둘씩 쓰러지자 기세가 당당해진 개화파들은 이날의 암호인 '천'을 외치며 일본 공사관이 있는 교동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민왕비의 구조 요청을 받은 청군은 1,500명의 병력으로 개화파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개화파와 정변을 도모했던 일본 군대가 느닷없이 중립을 표방하며 개화파에게 등을 돌려버린 것이었다.
김옥균 일행의 개화의 꿈은 단 3일 만에 처참하게 무산되어버렸다. 이 사건을 훗날 갑신정변 또는 3일천하라고 부르게 되었다.
혁명이란 성공하면 영웅이지만,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 것이다. 역적이 된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은 우선 일본으로 급히 도망갔다.
이 일로 서재필의 아버지, 어머니, 형은 음독자살하였고, 동생은 종로에서 형졸의 칼에 죽었는가 하면, 부인은 시부모를 따라 자살하였고, 두 살배기 아들은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굶어 죽고 말았다.
김옥균은 일본을 거쳐 청나라로 피신했는데 사주 받은 홍종우가 쏜 권총에 살해됐다.
홍종우는 김옥균 시체를 청나라 배에 싣고 양화진으로 와서 머리, 팔과 다리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박영효 가족도 온전하지 못하였는데, 형인 박영교와 아버지인 참판 박원양은 자살을 택했다.
서재필은 삼촌 서광범과 함께 연고가 아무도 없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왔다.
언어 소통의 장애 요인인 영어를 배울 겸 메이슨가의 교회에 몸을 의지하기로 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로버츠라는 실업가를 알게 되었고 우연히도 펜실베니아 대학의 이사이자 광산가인 로버츠의 친구인 홀넨백이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정규 학업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3년 후 서재필은 라파에트 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대학 2학년 때 그를 돌봐주던 화학 교수인 하트씨가 세상을 갑작스럽게 떠나자 하는 수 없이 학교를 중퇴하고 만다.
이때 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조차도 괴롭고 피곤할 뿐이었다. 그는 생계대책이 마련되지 않자 백악관으로 가서 다짜고짜로 당시의 대통령인 클리이블런드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떼를 쓰기도 했다.
일자리를 찾아 워싱턴으로 떠났는데, 그가 찾은 일자리는 미국 육군 의학박물관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온 의서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의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서재필은 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런 일이 계기기 되어 마침내 1889년 워싱턴의 컬럼비안 대학(현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의과대학에 야간학부에 입학하였다. 문구점을 차려 낮에는 장사하고 밤에는 학생의 신분으로 공부하였다.
컬럼비안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10일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1892년 콜롬비안 대학 예과를 마친 서재필은 컬럼비안 대학교의 본과로 진학하여 한국인 최초로 세균학을 전공한 의학 학사가 되었다.
컬럼비안 대학교를 재학 중 바로 가필드 병원에서 1년간의 수련의 인턴 과정을 거쳤다. 1893년 정식 의사면허를 받았다.
컬럼비안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1893년 6월 바로 모교인 컬럼비안 대학교의 강사가 될 목적으로 모교의 조교가 되었다.
그러나 유색인종에게서 강의를 들을 수 없다는 일부 학생들의 반발로 1년 만에 그만두고 만다.
1895년 서재필은 과거의 어둡고 괴로운 늪에서 빠져나와
미국 철도우편 창시자인 조지 암스트롱 대령의 딸과 결혼 하고, 그 이름도 필립 제인슨이라고 새로 지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언제나 조국의 산천이 푸르게 자라나고 있었다.
세월은 12년이 흘렀다. 조국의 정세도 변했다. 갑신정변의 동지였던 박영효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총리대신 김홍집에 의해 역적의 사면을 받고 귀국하여 내각의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였다
서재필은 잘 나간 박영효가 미국 워싱턴 건너와 조국의 소식과 개화운동의 동참을 권유하자 서울로 왔다.
귀국한 서재필은 1896년 일본에서 인쇄기를 구입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독립협회를 구성하여 개화운동에 열정을 쏟았지만 많은 저항에 부딪혀 결국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고 만다.
펜실베이니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을 때 조국의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한인친구회를 조직하여 미국의 각 신문들에 일본의 야만성을 통렬히 비난하는 등 재산 7만5천 달러나 소비하기도 하였다.
일본 패망 후 1947년 하지 장군의 초청을 받고 과도정부의 정무관에 취임하기 위하여 귀국하였지만, 어두운 정세와 이승만과의 심한 불화로 귀국 일 년 만인 1948년 9월 11일 인천항의 배편을 이용하여 다시 미국으로 떠나야만 했다.
서재필은 망명에서 얻은 한국인 최초의 의사로서, 단 한 번도 한국인들에게 의술을 베풀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지만, 《독립신문》을 발행하였고, 영은문을 과감하게 허물어 그 자리에 자주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을 건립한 애국정신만은 국민들이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
1951년 조국이 한창 동족의 상잔의 피로 강산을 더럽히고 있을 때 미국 땅 그의 병원에서 85세의 파란 많은 생을 마감하여 이국의 쓸쓸한 공동묘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1994년 4월 8일 그 유해를 모셔와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서재필이가 세웠던 독립문에 동상도 건립하여 그의 넋을 기리고 있는데 날마다 인파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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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정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