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최초 여의사 박점동
최초의 여의사는 박점동(1877~1910)으로 세례명은 박에스더이다. 1909년 4월 28일. 광화문과 해태 상사이로 상체를 드러낸 북악산은 한창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진달래꽃으로 온통 붉은 빛이었다.
그 자락으로 쭉 뻗어있는 육조 거리에는 아침부터 사람들의 발길로 붐비고 있었다.
흰 두루마기에 갓 끈을 동여맨 노인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아낙네들, 댕기 머리에 금빛 반짝이는 짚신을 신고 할아버지 뒤를 쫄랑쫄랑 따라가는 사내아이들, 그런가 하면 인력거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런 행렬들은 대한문 앞을 지나 숭례문까지 촘촘하게 이어져 있었다.
그 무렵 숭례문은 1899년 5월에 청량리간 서대문의 전철이 개통되면서부터 싸전거리로, 건어물거리로, 나무전거리로 한가할 날이 없었는데, 이날따라 더욱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도대체 오늘따라 무슨 일로 장안이 북새통이랩쇼?”
한 행인이 주걱턱 싸전 주인한테 물었다.
“객은 장안 사람이 아니시오?”
턱주걱 싸전 주인이 행인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장안 사람이라고 장안의 일을 어떻게 다 알 수 있소.” “가르쳐 주기 싫으면 그만 두시오.”
행인은 더 이상 묻는다는 것은 자존심을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는지 아예 앞 사람의 그림자를 밟고 따라가 보기로 했다.
북새통을 이룬 발길들은 하나 같이 서궐이라고 일컫는 뽕나무 울창한 경희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혹은 두 서너씩 무리를 지어가면서 무슨 이야기들을 신나게 재잘재잘, 조잘조잘 거리고 있었다.
“정말 장한 여성들이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남정네들도 못한 일을 여성들이 하다니.”
이날 경희궁으로 가는 사람들치고 이런 화제를 안 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늘 일판은 왕실에서 벌리신 거라며?”
키다리 젊은이가 늘어진 갓 끈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그러자 동행을 하던 뚱보가 큰일 날 소리란 듯 뒤를 흘끔 돌아 보고나서
“이 사람아, 일판이 뭔가. 환영회지. 환영회도 그냥 환영 회가 아니고 초대 여자 유학생 환국 환영회일세.”
하며, 키다리의 등을 딱 때리는 것이었다.
“참, 그랬었지.”
사실 이날 행사를 위해 윤치호, 김필순을 위시하여 미국 선교사 아펜젤라 목사와 언더우드 박사 등은 이런 갸륵한 여성의 보기 드문 일을 그냥 보고만 넘어갈 수 없다며 기념이 될 만한 일을 마련해 보자고 의논을 했었다.
수차례 머리를 맞대어 봤지만 별 좋은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언더우드 박사가 이런 제안을 꺼냈다.
“여자 유학생 세 명에 대한 귀국 환영회를 거창하게 열게 되면 사회의 좋은 귀감이 될 것 같습니다.”
“좋은 생각이오. 이런 여성들이 언제 또 나올지도 모를 일이니 아주 성대한 환영회를 열도록 합시다.”
이날 의논된 사항들은 윤치호를 통하여 곧바로 고종과 순종께 아뢰게 되었다.
“아주 좋은 생각이오. 이왕이면 관민합동으로 성대히 치르도록 하시오.”
고종과 순종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윤치호가 아뢰는 말씀에 쾌히 승낙함은 물론 기특한 세 여성들의 정신을 널리 알리어 많은 백성들이 본받도록 하기 위해서는 관민 합동으로 성대히 환영회를 치루라는 분부를 내리신 것이었다.
고종과 순종의 분부대로 박점동은 유학 귀국 9년이 되어서 구미 5개국 유학에서 갓 돌아온 윤정원과,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하란사와 함께 1909년 4월 28일 초대 여자 외국 유학생 환국 환영회 주인공이 되게 되었다.
“고종 황제께서 윤치호 고관과 김필순 고관한테 분부를 내리신 일이라니 왕실 행사나 다름없지.”
“대단하군. 그런데 초대 여자 유학생이 한 명도 아니고 셋이라며?”
키다리가 초대 여자 유학생 세 명에 대해서 무척 궁금해 하자 뚱보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한 여자는 열여섯 살 때부터 일본을 거쳐 벨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을 유학하며 음악과 외국어를 배우던 중 관립 한성 고등여자학교 설립으로 얼마 전에 귀국한 윤정원(尹貞媛)이요, 두 번째 여자는 1900년에 미국 웨슬레안 대학에서 미국의 학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이화학당에서 기숙사 사감과 영어 교사가 된 하란사(河蘭史)요, 세 번째 여자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점동(朴點童)이라며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마음 푹 놓고 물어 보라는 얼굴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말을 세게 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랴! 이랴!”
길을 비키라는 소리였다. 뒤를 돌아다보니 금테두리 중절모자에 새하얀 깃털을 꽂고 검정 예복을 단정히 뽑아 입은 마부가 쌍두마차를 몰고 활짝 열려진 경희궁의 홍화문을 향해 말고삐를 힘차게 당기고 있었다.
환영회가 임박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날 환영회에는 교육계를 비롯하여 여성단체, 종교계 등을 포함하여 천여 명의 내국귀빈과 아펜젤러 목사와 언더우드 등 외국 손님들이 다수 참석하여 이 행사를 빛낼 참이었다.
지석영, 최병헌, 유성준 등의 환영 연설이 있은 다음 세 분의 귀국 유학생에게 은메달 기념품이 전달되고 여학생들의 축하 노래가 궁궐 안에 메아리 칠 때 이 행사는 더욱 절정을 이루었다.
이날 행사의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인,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점동은 1877년 3월 16일 정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정동 부근에는 이화학당이 있었는데, 이 학당 설립자 스크랜튼 부인은 길에 나가서 직접 학생들을 모집해야만 했다. 그 당시 여자를 학교에 보낸다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그보다도 미국인에게 딸아이를 맡겨 외국물이 든 공부를 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하기 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개화에 눈을 빨리 뜬 박점동의 아버 지는 아들이 없으니 딸이라도 교육을 잘 시켜야 되겠다라는 마음으로 스크랜튼 여사에게 점동이를 맡기기로 했다.
이화학당에 입학한 점동이는 남달리 영어 회화에 뛰어났다. 점동은 졸업 무렵 이화학당 교장인 아펜젤러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박에스더였다.
1887년 이화학당 구내에 부인병 전담 병원이 개설되었다. 명성황후가 이 병원 이름을 보구여관이라고 지어 하사했다. 한옥을 개조한 온돌방이었다.
박점동은 이화학당에 다닐 때 영어를 잘해 부구녀관의 의학훈련반원 5명으로 뽑혀 기초적인 의학훈련을 받았다.
보구여관 닥터 로제타서우드는 박점동의 총명함을 잘 알고 미국으로 건너가 의학 공부를 배울 것을 권유했다.
이런 동기로 1896년 10월에 미국 유학의 길에 올라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 장학생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만리타국으로 처녀 혼자 유학을 보낸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부모의 반대에 부딪치자 크리스천인 박씨와 혼인식을 올려준 다음 부군과 함께 미국 길에 오르도록 해줬다.
당시 이화학당 규정으로는 재학중이라도 혼인 연령에 찬 독신자가 나타나면 학교에서 서둘러 적당한 신랑감을 물색하여 정혼을 주선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 부모가 정혼을 승낙하게 되면 학교에서는 신부가 가지고 갈 혼수일체는 물론 시집에서 쓸 자잘한 물건까지 구입해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결혼식 날은 신부의 단장이며 예식 절차를 거들어줄 수모(도우미)를 데려와 신부 화장에서부터 원삼 족두리로 예복을 갖추는 데까지 세심한 신경을 기울여줬다.
이렇게 예식 준비가 끝나면 사모관대로 예복을 갖춘 신랑과 함께 정동 교회에서 미국인 선교사 주례로 경건한 혼인식이 올려졌다. 이때 학교에서는 졸업 전에 합당한 절차에 의해 결혼을 하게 된 학생에게는 졸업장을 주는 대신 혼인증서를 주었다.
결혼식을 올린 박점동은 1896년, 부군 박씨와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박점동은 뉴욕 피클릭스쿨에서 1년 동안 수학하고 6개월간의 간호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곧바로 발티모어 여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의학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유학 온 지 4년 만인 1900년에 학위논문이 통과함으로써 명실 공히 한국 여성 최초 의사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애석한 일은 미국 생활에 있어서 경제적 뒷받침을 주기 위해 따라온 부군 박 씨가 박점동이 졸업시험을 치루고 있는 동안 뇌일혈로 세상을 떠난 일이었다.
이때가 졸업 3주일 전이었다. 참으로 슬프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으나 신앙심으로 그 모든 것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
여의사가 되어 귀국한 박점동은 곧바로 이화학당 병원에 취직했다. 이화학당 병원은 박점동이 박의사라는 직함으로 일하게 됨으로써 전에 없는 환자들로 붐비게 되었다.
부인과환자들은 박의사의 손이 스쳐만 가도 그토록 참을 수 없었던 복부의 통증을 말끔히 잊을 수 있었다며 그녀의 의술을 신격화 하다시피 했다.
박의사는 이화학당 병원에서 얼마 동안 여의사로 명성을 떨치다가 평양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기의 미국 유학을 주선해 주었고, 의사가 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배려가 깊었던 닥터 로제타서우드 여사가 두 번째로 한국에 와서 평양에다가 의료진료소 기홀병원(起忽病院)을 차렸기 때문이었다.
기홀병원으로 자리를 옮겨온 박의사의 의술은 더 무르익어 있었다. 이곳에 온 박의사의 진료 분야는 내과 외과 할 것 없었다. 이화학당 병원에서 보다 몇 배나 더 바빴다.
박의사의 손이 복부 수술을 할 때면 모두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사람들은 박의사가 배를 쓱 쨌다가 다시 꿰매어 놓은 것을 보고 귀신도 저런 귀신이 없을 거라며 딱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박의사는 날로 높아만 가는 명성과 함께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에 무료 진료도 나섰다. 의료 혜택이 닿지 않는 곳의 환자들을 손수 찾아가 그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운송 수단은 가마였다. 그러나 가마가 없는 곳에서는 소나 말을 타고서라도 환자가 있다는 곳을 찾아 나섰다.
박의사가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무료 진료한다는 소문이 나자 어느 고을의 군수는 만사를 뒤로하고 박의사를 정중히 모시느라고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박의사는 무료 진료 말고도 위생 강연을 통하여 무지한 농민을 계몽하는 데도 앞장섰다.
박의사 생활은 눈 코 뜰새 없이 바빴다. 닥터 로제타서우드 여사가 계획하는 맹아학교와 간호학교 설립에 누구보다도 먼저 나서서 도와줘야 했기 때문이다.
순전히 여자의 몸으로 사회사업에 청춘을 불사르다시피한 박의사의 봉사정신은 차츰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청진기 하나 목에 걸고 고통과 아픔에 시달리는 별의별 환자들과 함께 자신의 건강 한번 챙겨보지 못한 고달픈 생활을 하다가 그도 결국 영양실조와 폐침윤이라는 병을 얻고 말았다.
박의사가 의사라는 직업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병을 치료 하고자 결심했을 때는 이미 때늦은 다음이었다. 북경으로 요양을 떠나가 봤지만 깊어진 병세는 더 이상 호전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박의사는 애석하게도 병을 고치지 못하고 한국인 최초 여의가 된지 겨우 1년만인 1910년 4월 13일 서울의 둘째 형님 댁에서 서른세 살 한창 일할 나이에 아까운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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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정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