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美은행이 망하다니…돈묶인 기업 발동동, 줄도산 우려도


미국 서부 실리콘밸리 투자 생태계의 큰 축으로 성장한 스트타업 전문은행 실리콘밸리뱅크(SVB)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대량 예금인출과 주가 폭락 사태가 맞물리면서 40년 역사의 이 은행은 이틀도 안 돼 몰락했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은행 파산이라는 점에서 금융권 전반으로 재정 위기가 확산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10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로이터통신·월스트리트저널(WSJ)·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을 종합하면 미 캘리포니아주 금융보호혁신국은 유동성 부족과 지급 불능 등을 이유로 SVB전 지점을 폐쇄하고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파산 관재인으로 임명했다. FDIC는 '산타클라라 예금보험국립은행(DINV)'이라는 법인을 세워 SVB의 기존 예금을 모두 이전하는 한편 보유자산 매각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번에 파산한 SVB는 미국 산타클라라에 본사를 둔 벤처캐피탈(VC) 전문은행으로 1983년 설립됐으며, 캘리포니아주·매사추세츠주 등에 총 17개 지점을 보유하고 있다. 주로 VC 투자를 받은 기술 스타트업에 대출을 해주고 이들 기업의 예금을 유치하는 방식으로 성장했다. 스타트업들이 VC로부터 받은 투자금을 SVB에 예치하고, SVB는 이 자금을 다른 스타트업에 대출해 수익을 올리는 구조로 운영해 왔다.
미국 내 기술·헬스케어 스타트업의 44%가 이 은행의 고객사다. 글로벌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 미국 최대 스트리밍 하드웨어업체 로쿠, 사이버 보안업체 크라우드스트라이크, 게임 플랫폼 로블록스 등이 이 은행을 이용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FDIC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SVB의 총 자산은 2090억달러(약 276조원), 총예금은 1754억달러(약 232조원)로 미국 내 16위 규모 은행이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문을 닫은 저축은행 워싱턴뮤추얼(총 자산 3070억달러·약 406조원) 이후 역대 두 번째로 큰 은행 파산으로 기록됐다고 현지 언론들은 짚었다.


FT에 따르면 SVB의 기업가치는 18개월 전만 해도 440억달러(약 58조원)를 웃돌았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기간 정부의 금융완화 정책으로 유동성이 풍부해지면서 이 은행도 호황을 누렸다. 기술 관련 스타트업과 가상화폐 등 가치가 뛰면서 예금도 급증했다. 운용 자금이 풍부해지자 SVB는 2021년 '제로(0)' 금리 수준의 미국 국채를 대거 사들였다.


하지만 지난해 3월부터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금리를 공격적으로 올리면서 돈 줄이 말랐고 SVB의 상황도 어려워졌다. 유동성 위기를 맞은 SVB는 보유했던 국채와 모기지증권 등 80%를 팔아치웠다. 국채를 매입했던 때는 은행 예금이 넘쳐나던 호황기였지만 이후 채권금리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채권가격은 하락) 세후 18억달러(2조4000억원)에 달하는 손해가 났다.

막대한 손실이 불가피한데도 채권을 매각한 것은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는 방증이었다. 매도 가능한 증권을 처분하고도 자금이 부족해 22억5000만달러(약 3조원) 규모의 신주를 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SVB의 이같은 행보는 재무건전성 우려를 낳았고 주요 고객인 스타트업 기업들과 벤처자본가들이 예금을 대거 인출하는 뱅크런 사태로 이어졌다. 증시에선 SVB의 증자 발표 직후 주가가 60% 급락하는 대혼란이 펼쳐졌다. SVB 채권가격도 선순위 액면가 1달러당 45센트, 후순위의 경우 1달러당 12.5센트로 폭락했다.


미 금융당국은 SVB 인수자 등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주지 않고 이례적으로 빠르게 칼을 빼 들었다. 시장에서 자금 위기가 불거진 지 약 44시만 만이었다. 문제는 기업 고객들이 많아 파장이 더 크다는 것이다.
미국도 우리나라처럼 예금자보호제도가 있는데 그 한도가 25만달러(약 3억3000만원)다. 이 한도 내에선 예금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이를 초과하면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 FDIC는 오는 13일부터 예금보호한도 내에서 인출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SVB의 주요 고객들은 벤처캐피탈펀드, 스타트업 등으로 대부분으로 예금 규모가 보호 한도를 초과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말 기준 FDIC 보험 한도를 초과하는 예금 규모는 1515억달러(약 200조5000억원) 규모라고 WSJ은 추정했다. 이는 SVB 총예금의 86%가 예금자보호를 적용받지 못한다는 얘기다. 미 규제당국은 파산한 은행을 더 크고 안정적인 금융기관과 합병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어 고객들이 예금자보호 한도를 초과하는 예금 중 얼마나 더 많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돈이 묶인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이 직원 월급을 제때 지급하지 못하거나 자금 집행을 못해 줄도산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투자회사인 리퀴드 스톡의 창립 파트너인 그레그 마틴은 "SVB의 일부 급여 지급 프로세스가 중단됐다고 들었다"며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주로 1~2주 단위로 급여를 지급하는데 당장 다음주부터 직원 수만명이 급여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미 정부는 SVB 파산과 관련 과도한 우려를 경계하고 나섰다. 미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는 "우리 금융당국은 은행 시스템의 회복력을 강화할 수 있는 도구를 갖고 있다"며 "10여년전 금융위기 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밝혔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도 SVB 사태를 긴급 논의한 뒤 "몇몇 은행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으며 문제를 해결할 효과적인 수단이 있다"며 "추후 진행 상황에 따라 관련 조치를 내놓겠다"고 강조했다.
월가 전문가들도 SVB 사태가 은행권 전반 위기로 확산할 가능성은 낮다고 입을 모았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 측은 "은행들의 예대율은 팬데믹 이전과 비교할 때 상당히 낮은 편"이라며 "은행권 전반의 레버리지가 과도한 상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JP모건 역시 "대형 은행들은 소규모 은행에 비해 유동성이 풍부하고 고객층이 폭넓은 만큼 증시에서 은행주 전반의 매도세는 지나친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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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