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 보려고 새벽 3시부터 대기"...부패와의 전쟁이 마비시킨 베트남 의료시스템
이달 7일 낮 베트남 호찌민에 있는 남부 최대 국립 의료기관 초라이 종합병원. 접수처 앞에 100명 넘는 환자와 보호자가 앉아 있었다. 야외 대기실은 물론 진료실 앞에도 환자가 가득이었다. 호찌민 인근 붕따우에서 왔다는 호앙티응옥(50)은 “진료를 받기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밤 12시 30분에 출발해 새벽 3시에 접수 번호표를 받고 내내 기다렸다”고 말했다.
14일 베트남 의료 관계자 등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일선 병원에서 의약품과 의료 장비 공급 부족으로 진료가 지연되거나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대형 병원이든 소규모 의료 시설이든, 남부든 북부든 사정은 마찬가지다. 북부 최대 외과 병원인 하노이 비엣득 병원은 의료 장비 부족에 약품 공급난까지 겹치면서 이달 1일 이후 응급 수술 외 일정을 대거 연기했다.
닌빈성 출신인 짠롱(69)도 치료 우선 순위에서 밀렸다. 지난해부터 계속된 무릎 골관절 통증을 호소했지만, 수술 일정은 잡히지 않았다. 10일 비엣득에서 만난 그는 “1일에도 병원을 찾았지만 인공관절이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고 한다”며 “매일 진통제를 먹으며 견딘다”고 말했다.
대형 병원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30대 응오티까는 지난달 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 겪은 일을 들려줬다. 그는 “(하노이 남부) 탄호아에서 사고를 당해 탄호아 종합병원 응급실로 이송됐지만, 수술용 의료 장비가 충분치 않아 3시간이나 떨어진 상급 병원으로 옮겨졌다”며 “다행히 응급 수술이 가능해 목숨을 구했다”고 말했다.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MRI), 초음파 등의 영상 의학 검사 장비가 몇 달째 멈춰 섰으나 수리하지 못해 환자들의 대기 시간이 하염없이 길어지는 것도 다반사다. 의료진이 새벽부터 밤까지 진료를 하지만 역부족이다.
수술용 주사기와 마취제 등 의약품이 부족해 환자나 보호자들이 직접 구매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남편이 초라이 병원에 입원 중인 응우옌티뚜이(36)는 “항암 화학요법 약을 수천만 동(수백만 원)을 주고 외부 약국에서 비싸게 사야 한다”고 말했다.
베트남 병원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최근 진료 대란은 코로나19 팬데믹 등에 따른 공급망 붕괴에 정부가 주도하는 ‘부패와의 전쟁’ 여파가 더해진 결과다. 베트남에서는 지난해 코로나19 진단키트 납품비리 관련 스캔들이 터져 업계 관계자와 공무원, 기업인 등 100명 이상이 체포됐다. 보건부 장관과 감염병 담당 부총리도 옷을 벗었다. 재발 방지를 위해 의료 장비를 구매하거나 유지·보수 입찰을 할 때 3개 이상 업체로부터 견적을 받도록 의무화하는 등 규정도 강화했다.
부패를 막기 위한 조치지만, 엉뚱한 곳에 불똥이 튀었다. 병원의 의료 장비, 의약품 구매가 막힌 것이다. 판매자도 구매자도 엄격한 정부 규정에 몸을 사리면서 약품 부족은 더 심해졌다. 사정 드라이브로 고조된 공직사회의 ‘복지부동’ 분위기가 의료계까지 번졌다는 얘기다.
일선 병원의 진료 차질이 해를 넘기자 정부는 한발 물러섰다. 보건당국은 의료 장비 구매 시 병원이 1개 업체에서 견적을 받아도 입찰할 수 있게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심장전문의는 “지난 2주간 병원에서 수술을 30% 넘게 제한했고 상태가 심각하지 않은 환자의 진료는 미뤘다”며 “조만간 정상화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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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