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량, 장보의 무리가 봉기를 재촉하는 이면에는 개인적인 야욕이 존재하고 있음을 장각이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자신은 늙고 병약해 갔다. 장각이 죽으면 교단은 현재의 세를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장량과 장보, 그 주변의 교단 지도자들은 장각이 살아있는 동안 세속적 권
후한 왕조의 무질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전한 말 외척 왕망이 혼란을 일으킨 후, 광무제 유수가 이를 평정하여 후한을 건국한 것이 건무 원년(AD 25년)이었다. 이후 적미적, 공손술 등 각지의 도적떼와 군벌들을 정벌하여 전국을 재통일한 것은 11년 후의 일이었
몹시 피곤한 하루였다. 사람들이 물러간 후 장각은 평상에 앉은 채로 잠깐 잠이 들었다. 장각은 산에서 약초를 캐고 있었다. 홀연 맑은 바람이 일어나더니 한 노인이 앞에 나타났다.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학창의를 입은 품새가 속인의 자태가 아니었다. 노인이 손짓으로 장각을
대현량사(大賢良師)거리는 매우 번잡했다. 호박을 실은 일량거를 미는 짐꾼과 강에서 잡은 생선을 담은 멜대를 어깨에 멘 어부 사이를 짐을 가득 실은 마차가 밀고 들어왔다. 마부는 행인을 치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스럽게 말을 몰았다. 장터 한 복판까지 처마를 밀어낸 상점들에
낙양에서 동북으로 일천 팔백 리, 오환, 선비의 땅에 인접한 변방 탁군 탁현에 기울어져 가는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전한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의 곁가지 후손으로 동군 범현의 현령을 지냈던 유웅의 집이었다. 한때 지방의 세도가답게 규모는 있었지만 지붕이 내려앉
여남성 관아 뒷길에 소박한 수레 한 채가 섰다. 일산이 달린 고관용이 아닌 부녀들이 타고 다니는 사방이 막힌 수레였다. 조금 있더니 한 사내가 내렸다. 작은 키였지만 다부진 몸매에 동작이 가벼워 무술을 오래 연마한 것 같았다. 사내는 잠시 길을 찾
실사구시는 정론직설만큼이나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 정확한 의미를 알거나 그대로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전적 의미는 “사실(事實)을 토대로 해 진리를 탐구하는 일, 또는 진실에 입각해 의견을 진술하는 것”이다. 식자들도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