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대통령 관저 점령한 반정부 시위대, 총리가 대신 사임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 있는 대통령 집무동 근처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이던 이들이 집무동에 난입하는 바람에 대통령이 황급히 대피했다.
영국 BBC를 비롯한 외신들과 스리랑카 매체에 따르면 9일 수도 콜롬보의 대통령 집무동 인근과 거리에서 수천명이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전국 곳곳에서 몰려온 이들이었다. AFP 통신 등은 국방부 소식통을 인용, 시위대가 집무실과 관저가 있는 집무동으로 몰려들기 직전에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이 대피했다고 보도했다. 소식통은 대통령이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으며 “군 병력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지 TV 뉴스 채널과 소셜미디어(SNS) 영상 등을 살펴보면 시위대 수백명은 군경 방어망을 뚫고 대통령 집무동으로 진입했다. 일부는 국기를 들고 환호했고, 관저 내의 수영장 등에 뛰어든 사람들도 있었다.
군경은 허공에 경고 사격을 하고 최루탄도 쏘며 시위대 진압에 나서고 있다. 이 과정에 수십명의 부상자도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각 정당 대표는 긴급 회의를 열고 대통령과 총리의 사임을 요구했다. 마힌다 야파 아베이와르데나 국회의장이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이에 라닐 위크레메싱게 총리도 내각 회의 등을 소집한 후 사임에 동의한다는 뜻을 밝혔다.
앞서 야권, 학생단체, 노동조합 등은 이날 콜롬보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열겠다고 경고했고 전날부터 학생 등 수천명이 밤늦게까지 콜롬보에서 시위를 벌였다. 현지 경찰은 전날 밤 9시 콜롬보 등 일부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렸다가 반발이 거세지자 이날 오전 8시 해제했다. 당국은 대통령 집무실 등 주요 정부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군경 수만명을 동원, 경비를 대폭 강화하고 있다.
스리랑카에서는 민생고를 견디지 못한 시민들이 올해 초부터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특히 지난 5월 초에는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더욱 격화됐고 집권 라자팍사 가문과 현역 의원의 집 수십여 채가 불타는 등 큰 소요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 과정에 9명 이상이 숨지고 250여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됐다.
그 뒤 고타바야 대통령이 야권 인사인 위크레메싱게 전 총리를 신임 총리로 임명하면서 시위 기세는 한풀 꺾이는 듯했다. 하지만 기름, 의약품, 식품 등 생필품 부족과 인플레이션 상황이 개선되지 않자 다시 시위가 확산한 것이다. 민심의 분노는 특히 라자팍사 가문으로 향하고 있다.
스리랑카는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총리도 내정에 상당한 권한을 갖는 등 의원내각제 요소가 가미된 체제를 운용 중이다. 라자팍사 가문은 최근까지 이런 권력의 두 축을 모두 차지했다. 전임 대통령 출신인 마힌다 라자팍사는 총리를 맡았다가 지난 5월 초 사임했고, 그의 동생인 고타바야 대통령이 자리를 지켜왔다. 내각에도 이 가문 출신 장관 3명이 포진했다가 지금은 모두 사퇴한 상태다.
스리랑카는 주력 산업인 관광 부문이 붕괴하고 대외 부채가 급증한 가운데 지나친 감세 등 재정 정책 실패까지 겹치면서 최악의 경제난에 직면했다. 정부는 지난 4월 12일 국제통화기금(IMF)과의 구제금융 협상이 마무리될 때까지 대외 부채 상환을 유예한다며 ‘일시적 디폴트’를 선언했고, 지난 5월 18일부터 공식적인 디폴트 상태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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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