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조차 "쓰잘데기 없다" 현금 퇴짜…관광객에만 천국인 나라
“쌀·우유·기저귀·커피 등 모든 게 칠레보다 70%가량 싸다. 하루 쇼핑하러 넘어오는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최근 아르헨티나와 국경을 맞댄 멘도사주를 통해 ‘마트 싹쓸이’ 원정을 오는 칠레인의 말이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 같은 목적으로 멘도사주에 들어오는 칠레인이 하루 평균 5000명이 넘는다. 4월에만 20만 명 가까운 칠레인이 아르헨티나 국경을 넘었고 이 가운데 80%가 쇼핑 목적이었다고 한다.
반면 아르헨티나인들은 한숨 속에 마트 진열대 앞에서 발길을 돌리고 있다. 1991년 이후 처음 닥친 하이퍼인플레이션(세 자릿수의 물가상승률 등 통제 불능의 인플레이션 상황) 탓에 자국 화폐가 종잇조각이나 다름 없는 신세라서다. 달러를 쓰는 관광객들에겐 쇼핑 천국이지만 아르헨티나 자국민에겐 '인플레이션 지옥'이 펼쳐지고 있다.
"휴지 조각될라" 월급날 달러로 환전
아르헨티나는 전년 동월 대비 물가상승률이 지난 2월 이후 줄곧 100% 이상을 유지해 지난달엔 108.8%를 기록했다. 1년 전 닭 한마리 샀던 돈으로 이젠 반마리밖에 못 산단 얘기다. “벽지를 사는 것보다 저렴해 지폐(10페소)로 도배하는 사람도 있다”(파이낸셜타임스)고 할 정도다. 코로나19 팬데믹의 후유증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영향으로 인플레이션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한국·미국 등의 물가상승률이 한 자릿수인 점을 감안할 때 아르헨티나의 인플레이션은 차원이 다르다.
미국 달러 대비 아르헨티나 페소화 가치는 폭락했다. 미 NPR에 따르면 공식 환율 기준 미화 1달러는 1년 전 100페소에 거래됐지만, 현재 200페소가 넘는다. 암시장에선 페소화 환율이 1달러당 500페소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월급날이면 은행으로 달려가 페소화를 달러로 바꾸는 아르헨티나인들도 늘고 있다. 오죽하면 파라과이의 한 마트에 침입한 강도가 점원이 내준 아르헨티나 페소를 “쓰잘데기 없다”며 거절한 사건이 보도되기도 했다.
이에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지난 15일 기준금리를 97%로 올리는 초강수를 뒀다. 시중에 풀린 돈을 거둬들여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안간힘이다. 올 들어서만 네번째 기준금리 인상이지만 시장에선 오히려 혼란만 가중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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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주기'로 구멍난 재정 돈 찍어내 막아
2019년 집권한 좌파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페로니즘' 계승을 자처한다. 후안 페론 전 대통령의 이름을 딴 페로니즘은 '정부 주도의 대규모 무상 복지'를 가리키는 아르헨티나 정치·경제 체제의 특징이다. 1983년 민주화를 이룬 이래 지난 39년간 26년을 페로니즘 정권이 집권했다. 선거 때마다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공약과 정책이 쏟아졌고 재정 적자는 만성화됐다. 역대 페로니즘 정권이 세금 감면 혜택을 남발한 결과 현재 아르헨티나에서 소득세를 내는 근로자는 전체의 15%에 불과하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코로나19 기간 국민에게 현금 지급을 포함해 각종 보조금과 복지를 늘리고, 세금은 낮췄다. 이렇게 해서 생긴 재정 적자는 '돈 찍어내기'로 충당했다. 시중에 막대한 돈이 풀리자 아르헨티나 페소 가치는 급락하고, 인플레이션은 악화했다. 전년 동월 대비 물가상승률이 2018년 5월만 해도 26.3%였으나 지난 2월부터 세 자릿수로 치솟았다.
설상가상으로 올해 아르헨티나엔 60년 만에 최악의 가뭄이 닥쳤다. 아르헨티나는 세계 주요 대두 수출국으로 농업이 경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역대급 가뭄으로 대두 생산량이 23년 만에 최저 수준이 될 것이란 전망이다.
경제 위기의 피해는 고스란히 아르헨티나 국민이 떠안았다. 전체 국민에서 빈곤층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7년 20%대에서 최근 40%로 치솟았다. 식료품 가격이 하루하루 달라지니 아예 칠판을 갖다 놓고 그때그때 고치는 상점들도 많다. 현지 경제학자인 알도 알브람은 "이웃 나라 사람들이 아르헨티나에 와서 모든 걸 사 간다면, 그건 우리에겐 너무 비싸고 그들에겐 너무나 저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포퓰리즘의 반면교사..."재정 적자 관리를"
일각에선 국가 부도(디폴트)를 9차례나 겪은 아르헨티나가 10번째 디폴트 위기에 직면했다고 본다. 아르헨티나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도 지난해를 포함해 20차례 넘게 받아 막대한 빚을 지고 있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 압박을 받은 듯 오는 10월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지난달 전격 발표했다. 세 자릿수 물가상승률, 환율 급등 등 실정을 고려할 때 불가피한 선택이란 해석이 나오지만,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혼돈도 가중될 전망이다.
아르헨티나 이외에도 좌파 포퓰리즘 정권이 집권한 중남미 베네수엘라·니카라과 등에서 살인적인 물가 상승, 경제난이 공통적으로 발생하면서 무분별한 무상 복지를 펼치는 포퓰리즘 정책에 대한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오늘날 아르헨티나 사태의 근본 원인은 방만한 재정 운영인 만큼 물가 안정화를 위해선 재정건전성을 회복하는 리더십과 포퓰리즘 정책에 휘둘리지 않는 국민 의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도 재정 적자의 범위와 국가 부채 증가 속도에 대한 실효성 있는 관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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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