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국회의원 특권 언제까지 포기 안하고 쥐고 있을 것인가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로서 국민의 선량으로 입법과 관련하여 헌법과 법률을 개정 제안·의결하고, 국가재정과 관련하여 정부의 예산안을 심의·확정하고 결산을 심사하며, 일반국정과 관련하여 감사와 조사를 실시한다. 또한 국회의원은 지역구를 대표하는 그지역주민들의 얼굴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들은 여야 대부분이 민생에 관심이 없고 지역주민들을 대변할 생각이 없으며 오로지 그 자리를 사수하기 위한 일에만 앞장서 활동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은 그런사람들을 공천한 정당의 책임이 첫 번째고 그 다음이 그런자들을 선출한 그지역 주민들의 책임이 크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책임을 따지기 전에 국회의원들이 본인들 자리를 지키고가 만든 온갖 특권들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죄를 지어도 면책특권이라는 방패뒤에 숨어서 책임을지지 않으니 국회의원들이 서로 똘똘뭉쳐 ‘방탄국회’라는 말이 나올정도 아닌가.
검수완박으로 여의도가 들썩거릴 때 검수완박을 주도했던 윤호중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검찰과 언론을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특권 영역”이라며 “이 특권을 해체하는 일에 민주당이 나섰다”고 했다. 정파가 같으면 이런 말도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아무리 열혈 지지자라도 ‘마지막 특권’이란 대목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특권의 끝판왕, 한국 국회의원이 있기 때문이다.
면책, 불체포 특권, 보좌 직원 9명, 본인을 포함해 한 해 인건비 6억여 원, 45평 사무실, 비행기 비즈니스석, 출국 시 귀빈실 이용, 차량 유지비·유류비·교통비 지원 등 한국 국회의원은 이 땅에서 세금으로 받을 수 있는 모든 혜택을 누린다. 물론 그들이 산출하는 국익이 더 크면 특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럴 경우엔 더 해줘야 한다. 이들의 진짜 특권은 다른 차원이다. 특권을 누리면서도 나태하게 살 수 있는 특권, 엉터리 법과 세금 나눠 먹기로 국익을 좀먹을 수 있는 특권, 후진국 매너로 국가 위신을 추락시킬 수 있는 특권, 무식하게 대들수록 팬덤 정치의 영웅으로 떠오를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위안부 피해자 기부금을 빼먹고도 특권을 계속 누릴 수 있는 특권까지 있다. “금배지를 달면 100가지 특권이 따라온다”란 말처럼 끝이 없다.
이 중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은 17세기 영국에서 절대군주로부터 의원들을 보호해 의원들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의정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면책특권의 제도적 의의는 권력분립의 원칙에 입각하여 행정부나 사법부의 불법·부당한 법집행이나 탄압으로부터 국회의원을 보호하여 국회의 자주적 입법활동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면책특권이 부당한 권력으로부터의 직무상 독립이 아닌, 상대 정파를 공격하고 정치적 흠집내기를 하는 수단으로 무분별하게 남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의원들은 면책특권을 활용한 ‘묻지마식’ 정치적 폭로의 가해자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피해자가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자신들의 처지에 따라서 면책특권에 대한 태도도 시시각각 변하는 기이한 현상이 심심찮게 발생하였다. 자신들이 폭로전의 주역일 때에는 면책특권은 헌법상 보장된 천부인권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다가도 자신들이 피해자가 될 때에는 그 폐지를 주장하는 것을 우리는 여러 차례 보았다.
헌법이 국회의원들에게 불체포특권이나 면책특권을 부여한 것은 국회의원들에게 ‘특별한 권리’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국민들을 위해 쓰도록 그들에게 ‘정당한 힘’을 준 것이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이 이러한 정당한 힘을 국민들을 위해 쓰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특별한 권력인 양 남용한다면 이러한 특권은 당연히 빼앗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국회의원들의 무분별한 폭로와 비방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면책특권의 폐지·축소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면책특권의 폐지·축소는 헌법에 위배되고 정치적 탄압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비판과 우려 때문에 구체적인 제도개선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한국 국회의원의 수준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여실히 그것도 세계에 보여준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화상 연설 장면은 한국 정치의 대표적 흑역사로 남을 것이다. 국회의원 300명 중 50여 명 참석했다. 장애인인 이상민 의원은 휠체어를 타고 왔다. 그런데 나머지 240여 명 대부분이 이날 무슨 일을 했는지 파악도 되지 않는다. 연설장에서 졸거나 전화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안 온 사람보다 낫다. 장소가 중학교였어도 이보다는 많이 모였을 것이다.
국민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은 사실 먼 이야기다. 경유, 식용유, 밀가루 가격을 보고서야 피부로 정세를 체감할 수 있다. 대부분 나라 국민이 이렇다. 그래서 국민보다 깊은 관심을 갖는 전문가 엘리트를 뽑아 정치를 시킨다. 그런데 한국에선 국회의원이 국민보다 우크라이나에 관심을 덜 갖는다. 국민이 일을 맡겨도 안 할 특권이 있기 때문이다. 특권에 빠져 사느라 경유, 식용유, 밀가루 값을 체감할 일도 거의 없다. 심지어 많은 국회의원이 국제 뉴스도 안 본다.
‘그레이트 게임’이란 말이 있다. 유라시아 패권을 노리는 러시아의 남하(南下)와 이를 막는 영국 제국의 장기전을 말한다. 19세기 세계사는 이 말로 대부분 설명된다. 게임의 시작은 우크라이나 크림 전쟁, 종착점은 영국을 대리한 일본과 러시아가 맞붙은 러일전쟁이다. 전쟁 결과, 한국은 망했다. 일본의 비약, 한국의 멸망은 이 게임의 결과물이다.
한국이 망한 결정적 원인은 당시 정치인이 제공했다. 일본이 흥한 원인도 정치인이다. 한국 정치인이 세상과 담을 쌓을 때 일본 정치인은 세상으로 나갔다. 당시 양국 정치인의 차이를 보여주는 많은 일화가 있지만, 얼마 전 국회에서 벌어진 장면만큼 생생하게 보여주지 못한다. 젤렌스키 연설에 일본 국회의원 500여명이 참석했다. 총리, 국회의장, 장관도 함께 경청했다. 진지했다. 외무장관이 마스크 안에서 하품했다가 “나라의 수치”라는 비난까지 들었다. 무언가 거꾸로 됐다. 일본이 아니라 세상사에 어두워 나라를 말아먹었던 한국의 정치인들이 이런 자세를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한국 정치인들은 미국,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 사이를 오가면서 이익만 챙기면 된다고 믿는다. 한국은 그래도 되는 변방이라고 생각한다. 사드, 쿼드를 말하면 중국의 경제 보복을 말한다. 중국이 말하기 전에 스스로 한다. 바람이 불기 전에 눕는다. 그게 상책이라고 한다. 조선 말 세계관과 달라지지 않았다. 세계관이 달라지지 않으면 미래도 달라지지 않는다. 우크라이나가 강대국이어서 버티는 게 아니듯 국력이 크다고 강한 나라가 아니다. 정치인이 저질이면 삼성의 성과도, 한류의 바람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한국 국회의원 가운데엔 뛰어난 사람이 많다. 그런데 아까운 인재들이 들어가 휩쓸리는 순간 단숨에 밑바닥으로 내리깔리는 장면을 여러 차례 봤다. 그들의 정신을 썩혀버리는 특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일은 국회의원의 특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것이다. 집단 특권을 없애야 요즘같이 떼로 몰려 폭주하지도 못 한다. 검수완박처럼 이름을 붙이면 국특완박이다. 국회의원 스스로 할 수 없다. 새 정부가 총선 과제로 제시하면 거의 모든 국민이 지지할 것이다.
국회의원에게 면책특권을 주는 것은 국민의 대표로서 이러한 특권을 남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면책특권을 악용한 정치인은 사법적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만 국민의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국민의 심판에서도 면책을 받을 수 있는 정치인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면책특권의 매력과 유혹보다 부적절한 사용에 따른 윤리적 책임과 여론의 심판이 더 무섭다는 인식이 존재할 때 국회의원들은 스스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이를 위한 제도 마련과 유권자들의 관심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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