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번호로 전화오면 일단 두려워” 빚 갚기 미루다 ‘수십 년’ 신용불량자


“남아있는 생이 더 많은 청년들,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10년이 넘는 세월을 채무 불이행자(신용불량자)로 살아온 이모(50) 씨는 본지와의 첫 통화에서 유독 긴장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는 “지금처럼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일단 두려움이 앞선다”며 “지금은 빚을 해결하는 단계에 있지만, 아직도 10년간 쌓인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는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다니던 직장이 어려워지고 급여가 나오지 않자, 생활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카드론과 마이너스통장 대출 등을 통해 4000만원을 빌렸다. 이후에는 일용직을 전전했지만, 불편한 다리 탓에 충분한 소득을 얻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연체가 시작되며 채무액은 불어났고 신용불량자로 등재됐다. 10년간의 고통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다만 상환 의지를 잃지는 않았다. 이씨는 불안정한 수익에도 허리띠를 졸라매 상환 자금을 모아나갔다. 우연한 기회에 채무구제 프로그램의 도움도 받아, 원금을 3000만원으로 줄였다. 그리고 지난해 여름, 약 10년 만에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났다. 그는 “아직 갚아야 할 대출이 1200만원가량 남았지만, 마음은 조금 떳떳해졌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씨는 현재 부채로 고통받는 청년들에 하고픈 말이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 1년만 고생했어도, 금방 지금의 삶을 되찾을 수 있었을 거라고 후회하곤 한다”면서 “지금 당시의 나와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청년들에 ‘남아있는 생을 위해 용기를 내고, 너의 삶을 찾으라’고 얘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청년층 시기 놓쳐 ‘장기 신용불량자’ 될 수도…도망치지 말아야”


31일 나이스(NICE)평가정보의 ‘채무 불이행자 현황’ 자료에 따르면 60대 이상 채무 불이행자 수는 2018년말 10만8141명에서 5년 뒤인 2023년말 12만9062명으로 2만921명(19.3%) 늘었다. 여타 연령대가 큰 폭으로 감소한 것과는 반대의 결과다.

이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3년 카드사태 당시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이후 신용을 회복하지 못한 ‘장기 신용불량자’들의 고령화가 수치로서 나타난 결과다. 금융권 관계자는 “고령층 신용불량자의 경우 채무 불이행이 장기화되면서, 노동 능력이나 상환 의지를 상실하고 수급비 등으로 간신히 생활을 영위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최근 급증하는 청년 신용불량자들의 신용 회복이 더뎌질 경우, 이같은 현상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 수십 년의 신용불량자 생활을 극복하고 ‘늦깎이 재기’에 성공한 이들은 청년들이 자신들과 같은 수순을 밟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아울러 “청년들이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달라”고 입을 모았다.


무엇보다 하루빨리 빚을 마주하고, 해결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당부가 주를 이뤘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자동차매매센터를 운영하던 유모(60) 씨는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한 후, 집을 포함한 재산을 모두 잃고 노숙자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나이는 33살, 채무원금은 4000만원이었다. 이후 26년간 신용불량자 생활을 영위한 그는 59세의 나이에 접어들어서야 다시금 신용을 회복할 수 있었다.

유씨는 “휴대전화 요금, 건강보험료 등 그 어느 하나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렵게 가진 아이를 안아보지도 못하고 입양 보내는 아픔을 겪으며 생을 끝내려 했다”며 “신용불량자 생활을 하면서도 간간히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걸 빼앗긴 후였기에 아무런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신용회복위원회 워크아웃 제도를 통해 채무조정을 받은 뒤, 빚을 갚으며 일상을 회복하고 있다. 하지만 빚으로부터 도망치기만 했던 청년기가 떠오를 때면, 후회는 반복된다. 유씨는 “청년들에게 다시 살아날 방법은 존재하니, 제발 도망치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다”면서 “하루빨리 회복할 방안을 찾을 수 있도록, 정부와 기성세대도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주변에 도움 구하는 게 시작…전문가들 선제적 도움도 필요”


주변에 채무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조언도 이어졌다. 1990년대 중반까지 높은 연 매출을 기록하던 중소 건설장비업체를 운영한 김모(63) 씨는 당시 거래처와 법적 분쟁에 휘말리며, 헐값에 사업체를 정리했다. 이후 방황을 지속하던 김씨는 도박에 손을 댔다. 도박자금 마련을 위해 집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았지만, 결국 남은 건 채무 2억원뿐이었다.

김씨가 채무를 온전히 정리할 수 있었던 건, 20년간 숨겨왔던 채무 사실을 가족들에 말하면서부터다. 김씨는 “아내에게도 신용불량자가 된 계기나 채무 규모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하지 못했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상황은 안 좋아지기만 했다”면서도 “모든 걸 고백하고 나서부터는 머리를 맞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고, 개인회생을 진행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58세 박모 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20대 후반, 친지의 사업자금을 대신 마련해주기 위해 5000만원의 은행 대출을 받았다. 소유한 주택도 담보로 내놨다. 하지만 소득이 불안정해지며, 이자를 납부하지 못해 연체가 지속됐다. 불법사금융에도 손을 뻗었다. 이후 사채이자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고, 총 5억원에 가까운 돈을 갚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수십 년간 채무를 회피하기 급급했던 그는 50대의 느지막한 나이에 배우자를 만나, 문제를 마주할 수 있었다. 배우자는 박씨의 사정을 알게 된 후, 채권 정리를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채무 상담 기관에도 도움을 청했다. 이에 소멸채권을 제외하고 총 1억원 정도의 부채를 나눠 상환하면, 신용을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박씨는 “청년들도 나이가 들어 해결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와 같은 후회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오랜 기간 족쇄를 차는 경험을 하기 전에 가족·친구 등에 알리거나 관련 기관에서 상담받는 등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년 신용불량자들은 가족 등 주변 사람들에 채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홀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불법사금융에 발을 들이고, 채무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 사례도 있었다. 애초에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가족 등이 없는 환경에 놓인 청년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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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