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유해, 소나무관 안치 후 장례"...당시 中기사 발굴
안중근의사 순국 당시 중국 현지 신문 기사 최초 발굴 및 공개
국가보훈처는 안중근의사 의거 113주년을 맞은 26일 안중근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직후 중국 현지에서 보도된 안의사 유해에 관한 기사와 안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의 사회장 거행에 관한 기사를 처음 발굴해 공개했다.
이 자료는 보훈처와 주상하이총영사관이 독립유공자 발굴·포상에 필요한 입증자료 수집을 위해 지난 1년여 간 공동으로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발행된 신문·간행물 88종’ 중 독립운동 관련 기사 3만 3000여 매를 발췌 후 분석하는 과정에서 발굴됐다.
먼저 중국 만주지역 발행신문인 ‘성경시보’에서 1910년 3월 26일인 안의사의 순국 나흘 후 1910년 3월 30일에 보도한 기사다.
이 기사에는 안의사의 둘째 동생인 안정근지사가 안의사의 유해를 한국에 옮겨 매장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일본당국이 거부한 사실과 당시의 정황이 상세히 서술돼 있다.
당시 안정근지사의 요청에 대해 일본당국은 “유해는 다른 사형수와 동일하게 감옥이 관리하는 사형수 공동묘지에 매장될 것이라고 대답”했는데 이는 안의사의 유해가 당시 여순감옥 내 공동묘지에 매장됐을 것이라는 유력한 가설을 한 번 더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보훈처는 설명했다.
또 기사에 따르면 요청이 거절된 후 안정근지사는 당시 안의사와 일정한 친분관계가 있었던 감옥 관리자에 간곡히 부탁했다.
이에 감옥 관리자는 하얼빈의 소나무로 만든 관에 유해를 안치하고 조선 풍속에 따라 관 위에 흰 천을 씌운 후 영구를 감옥 내의 교회당에 둔 후 우덕순 등 3명의 죄수들에게 조선 예법에 따라 두 번 절을 하게 해 고별식을 치르도록 허락했다.
보훈처는 특히 안의사의 유해가 하얼빈 소나무로 제작된 관에 안치됐다는 내용은 물론, 안의사 유해의 행방을 추정해 오다 이번에 처음으로 여순감옥이 위치한 중국 만주 현지에서 당시에 이를 보도한 기사를 발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안중근 의사 연구 권위자인 오영섭 박사는 “안의사의 관을 하얼빈산 소나무로 제작했다는 내용은 처음 밝혀진 귀중한 사실”이라며 “안의사의 유해 찾기에 있어서 작지만 유익한 단서를 얻은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안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의 생전 독립운동 활동과 사회장 거행을 다룬 중국 상해 발행신문인 ‘민국일보’의 1927년 7월 19일자 기사도 발굴됐다.
1910년 안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순국 후 “친동생(안정근)이 장례를 위해 유해를 원했으나 일본관리가 그 유해를 강탈해 돌려주지 않았고”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이에 분노해 두 아들인 정근과 공근을 이끌고 러시아로 이주해 애국사업에 매진했다고 소개했다.
이후 1919년 한국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다시 두 아들과 함께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조마리아 여사는 병환으로 1927년 7월 15일 향년 66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기사는 “상해의 많은 한국 동포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이에 따라 특별히 사회장이 거행돼 19일에 발인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지역 독립운동 연구 권위자인 박환 수원대학교 교수는 “그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상해 한인교민단 교민장으로 알려졌던 조마리아 여사의 장례식이 그보다 높은 예우인 사회장으로 치러졌다는 점이 새롭게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보훈처는 현재 안의사의 유해 발굴을 위해 중국 정부와 지속적으로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안의사 유해의 정확한 매장지 파악을 위해 관련국 주요 문서보관소 등에 대한 조사도 병행 추진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발행된 신문 및 간행물 88종 분석을 통해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추측되는 인물 2000여 명을 확인, 이 중 미포상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을 추진할 계획이다.
박민식 보훈처장은 “이번 안의사의 순국 관련 기사와 관련 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함으로써 안의사의 유해 발굴이 하루라도 더 빨리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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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