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황건적의 난3.

후한 말기의 정세


후한 왕조의 무질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전한 말 외척 왕망이 혼란을 일으킨 후, 광무제 유수가 이를 평정하여 후한을 건국한 것이 건무 원년(AD 25년)이었다. 이후 적미적, 공손술 등 각지의 도적떼와 군벌들을 정벌하여 전국을 재통일한 것은 11년 후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백여 년이 지나 어린 황제들이 잇달아 등극하면서 한조에는 망조가 깃들기 시작했다.
건강 원년(144년) 충제가 두 살의 나이에 제위를 계승했다가 일 년 만에 죽자, 영가 원년(145년)에 질제가 여덟 살의 나이로 등극하여 역시 일 년 만에 죽었다. 본초 원년(146년)에 하간왕 효의 손자인 유지가 십오 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으니 이가 곧 환제였다. 환제는 이십일 년간 재위했으나 영강 원년(167년)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뒤를 이어 환제의 조카뻘인 하간왕 효의 증손인 해독정후 유굉이 건녕 원년(168년)에 열두 살의 나이로 제위를 이었으니 이가 바로 영제였다.
어린 황제들이 제위를 승계하는 동안 조정은 외척과 환관들의 권력 쟁투의 장이 되어버렸다. 황제가 후사 없이 죽으면 다음 황제의 선택권은 황태후에게 주어진다. 황족 중에서 후임자를 골라 양자로 입양함으로써 전임 황제의 후사를 잇게 하는 것이다. 황태후의 일가인 외척들은 정권을 최대한 오래 독점하고자 조정 중신들과 짜고 가급적 어린 황제들을 연달아 등극시켰다.
그러나 환제 이후에는 환관들의 득세가 두드러졌다. 환, 영제는 어린 나이에 등극하여 황태후의 대리청정을 받았지만 각각 이십 년 이상 재위해 친정체제를 구축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정권을 독점하고 있는 외척들로부터 실질적 통치권을 빼앗아 오는 과정에서 황제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 환관 집단이었다. 조정의 중신들은 다 외척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이 외가 식구라지만 입양에 의해 후사를 이은 황제의 입장에서는 외척들은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남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장성해 친정체계를 구축할 때가 되면 외척들을 가차 없이 숙청하곤 했다.
환제 말기에 이르러 환관들의 권력독점이 확립되었다. 환관들은 조정 내의 권력투쟁이나 권모술수에도 능했을뿐더러 어려서부터 어린 황제를 업어서 키우다시피 해 황제와의 친밀도가 조정의 신료들보다 훨씬 더 높았다. 전제 왕권 하에서 황제와의 거리가 가깝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환관들이 조정을 지배하자 사대부들은 가문의 영달을 위하여 환관 세력에 아부하게 되었다. 고위 관직의 임용을 통해 가문의 영예를 드높이고 가산을 축적해야 하는데, 사실상 관직의 임용권은 환관 집단이 독점하고 있었다.
한편 후한 말부터 사대부 사이에서 청담 사상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고상한 품격과 절조를 중시하고 세속의 명성과 이익을 가볍게 여기는 사상이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사대부들을 청류라고 불렀다. 이들은 사제지간으로 서로 얽혀 당을 결성하고 부패한 환관과 조정 고관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 중 명성이 높은 선비들을 명사라 칭했다.
가장 명성이 높은 선비들은 이응, 순익, 두밀, 왕창, 유우, 위랑, 조전, 주우 등 여덟 사람이었는데 이들을 일컬어 팔준(八俊)이라 했다. 이 바로 아래 등급의 곽태, 범방, 윤훈, 파숙, 종자, 하복, 채연, 양척 등을 팔고(八顧)라 불렀고, 장검, 적초, 잠질, 원강, 유표, 진상, 공욱, 단부 등 여덟 사람을 팔급(八及)이라고 칭했다. 준이란 일세의 걸출한 인사를 지칭하고, 고란 덕으로서 타인을 인도하는 사람을 말하며, 급이란 다른 사람을 인도해 선생을 따르는 사람을 의미했다. 이외에도 재물을 풀어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자들을 팔주(八廚)라 했는데, 탁상, 장막, 왕효, 유유, 호모반, 진주, 번향, 왕장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이 환제 말 조정에 진출하여 당을 이루고 조정의 권신들과 환관 세력을 비판하자, 환관들은 환제를 움직여 이응, 두밀 등 청류 인사들을 금고에 처했다. 조정에서 추방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관직에 재임용될 수 없도록 조치한 것으로 출사하는 것이 존재의 근거인 사대부들에게는 치명적인 탄압이었다.
환제가 붕어하고 건녕 원년(168년) 영제가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조정의 권력은 대장군 두무와 승상 진번에게 돌아갔다. 두무는 두태후의 아버지로 안풍정후 두융의 현손으로 가문도 훌륭했을 뿐만 하니라 젊어서 헉업에 정진하며 시사에 관여하지 않아 관서 지방에서 명성이 드높았던 청류인사였다. 진번은 유명한 사족 명사 출신으로서 두태후가 태후가 되는 데 도움을 준 적이 있었다.
이들은 환제 시절에 금고에 처해졌던 이응 등 청류 명사들을 금고에서 해제하고 다시 조정에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진번과 두무가 환관 세력들을 일소하고자 시도하자, 그 해 겨울 조절과 왕보 등을 중심으로 하는 환관 세력들이 선수를 쳐 궁정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신체가 건장한 장락종관사 공보, 장량 등 열일곱 명의 환관과 작당하여 칼을 뽑아들고 어린 황제를 위협하여 덕양전 앞으로 나아가게 한 후 조서를 강제로 작성하여 두태후를 남궁에 유폐시키고 두무와 진번을 잡아들이도록 명했다. 이때 금군을 이끌고 북군의 병영으로 가 두무를 체포한 자가 건석이었다.
쿠데타가 성공하자 이듬해인 건녕 2년(169년) 조절 등은 제2차 당고의 금을 일으켜 이응 등의 당인들을 조정에서 완전히 추방하고 철저하게 탄압했다. 이로써 조정의 모든 권력은 환관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연속되는 환관과 외척간의 권력투쟁으로 조정은 지샐 날이 없었다. 환제 즉위 이래 선비, 오환, 강족 등 외적의 침입이 매년 발생해도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국내에서도 만이와 도적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환관들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자 과도한 수탈과 착취가 이루어졌다.
여기에 영제 자신의 재물에 대한 탐심이 더해져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영제는 즉위 이전 하간에 거주할 때 경제적 곤란을 겪었었다. 즉위 후 선제인 환제가 개인적으로 축적해 놓은 재물이 없는 것을 한으로 여긴 영제는 장성하여 친정체제를 구축하자 암암리에 이루어지던 매관매직을 공식화했다. 매관매직 수입을 환관들의 수중에서 빼앗아 자신의 사재 축적의 수단으로 활용코자 한 것이다. 처음은 서원(西園)에 창고를 지어 들어온 금전을 은으로 보관했으나, 창고가 차고 넘치게 되자 환관들의 창고에 보관을 위탁했으므로 실질적인 재산에 대한 관리권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환관들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황제와 근신들이 쓸 곳도 없는 재산을 산처럼 쌓아 놓는 동안 백성들은 죽어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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