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 마리 잠룡2

2) 유현덕(劉玄德): 돗자리 삼던 소년



낙양에서 동북으로 일천 팔백 리, 오환, 선비의 땅에 인접한 변방 탁군 탁현에 기울어져 가는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전한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의 곁가지 후손으로 동군 범현의 현령을 지냈던 유웅의 집이었다. 한때 지방의 세도가답게 규모는 있었지만 지붕이 내려앉고 기와 위에 초목이 무성한 게 쇠락함이 절로 드러났다. 다만 집 동남쪽 모퉁이에 커다란 뽕나무가 있어 주변의 다른 집들과 달리 두드러져 보였다. 이 뽕나무는 높이가 다섯 장이 넘을 뿐만 아니라 수형이 매우 아름다워 멀리서 보면 마치 황제의 수레에 달린 일산과 같았다.

뽕나무 아래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전쟁 놀이를 하고 있었다.
“덕연이 너는 일군을 거느리고 저쪽 언덕 아래 매복하라. 나는 이 곳에 주진을 치고 적을 맞겠다.”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도형을 그려가며 지휘하고 있는 소년의 얼굴에서 진지함이 배어 나왔다. 다른 소년들보다는 머리 하나가 더 있는 데다가 유난히 상체가 커 듬직해 보이는 체구였다. 양팔은 특히 길어 몸을 빳빳이 세워도 두 손이 무릎에 닿을 정도였다. 안광이 번쩍이는 큼직한 눈은 길게 찢어져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유비로 자(字)를 현덕이라 했다. 아버지 유홍이 평생 백수로 지내다가 유비가 어려서 일찍 죽었기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 빈한했지만, 항상 행동거지에 무게가 있었다.

한바탕 먼지를 일으키고 놀고 나더니 모두 전쟁을 지휘하던 소년 앞에 도열했다. 마치 잘 훈련된 군대와 같았다. 점고가 끝나자 소년은 뽕나무를 가리키며 자신 있는 어투로 말했다.
“나는 커서 반드시 이와 같은 일산이 달린 수레를 타고 다닐 것이다.”
마침 지나가던 숙부 유자경이 이 소리를 듣고 기겁을 했다. 유비의 귀를 잡아 끌고 집으로 데리고 가면서 엄하게 질책했다.
“이 놈. 헛소리 함부로 하지 마라. 이놈이 집안을 말아 먹을 놈이로구나!”
자경이 놀라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찍이 탁군에 점을 잘 치는 이정운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유비의 집에 있는 뽕나무를 보고는 ‘장차 이 집에서 크게 귀한 사람이 나올 것이다.’ 라고 했었다. 그 외에도 오가는 사람마다 그 나무의 생긴 모양을 기이하게 여기며 수군거리곤 했었다. 이처럼 큰 일산을 쓰고 다닐 귀인이 그 집에서 나올 것이라고... 그 귀인이 황제밖에 더 누가 있겠는가. 비록 쇠하기는 했지만 한 황실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때에 그와 같은 이야기는 멸문지화를 부를 소리였다. 멀리 뻐꾸기 소리가 들리고 대청 마루에선 한가롭게 멍석을 짜느라 북돌을 놓는 소리가 났다.

유비가 나이 열다섯이 되자 글공부를 위해 집을 떠나 노식의 문하로 들어갔다. 노식은 후한 말 훈고학1)의 대가인 마융의 제자로서 당대 최고의 유학자 정현과도 동문수학한 탁군 출신의 유명 인사였다. 벼슬이 구강태수에 이르렀으나 마침 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탁군 출신의 대학자로 고관을 지낸 이가 고향에 내려오자 지역의 유지들이 그대로 버려둘 리가 없었다. 앞다투어 자금을 출연해 학교를 열고 노식에게 자식들을 가르쳐 줄 것을 청했다. 주나 군의 구실아치가 아닌 조정의 벼슬아치를 지내려면 이름 높은 학자나 고관, 혹은 그 지역의 자사나 태수의 추천이 필수적이었다. 이참에 사제지간의 연을 맺어두는 것은 후세를 위해 가장 좋은 투자가 될 수 있었다. 노식은 탁군의 유력자인 구씨네의 장원에 학교를 열었다.

유비의 어머니도 유학을 보낼 뜻은 있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가세는 기울었지만, 명색이 사족 출신이라 아무 일이나 할 수는 없어서 유비와 함께 돗자리와 짚신을 짜 시장에 내다 파는 것으로 생계를 잇고 있는 마당에 노식 같은 저명한 학자에게 바칠 예물이나 노자, 학업 기간 중의 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마음만 굴뚝 같던 때에 마침 동네에서 가장 재력이 있던 유원기가 찾아왔다. 유비에게는 재종 당숙뻘이었다.
“형수님. 현덕에게 학문을 시킬 생각은 없으신지요.”
“그 아이 부친이 벼슬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었는데 어찌 가르칠 생각이 없겠습니까. 다만 먹고사는 것도 이웃에 기대는 형편에 무슨 재주로 유학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현덕의 어머니는 한숨만 내쉬었다.
“이번에 우리 아이 덕연을 노식 선생께 보내어 수학케 하려는데, 현덕을 함께 보내면 어떨까 해서요. 덕연이 마냥 귀하게만 자라서 외지에 나가 적응을 잘 할지 걱정도 되고... 현덕이 함께 가면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일체의 비용은 제가 다 대기로 하지요.”
현덕의 어머니로서는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었다. 그 날로 행장을 꾸려 현덕을 떠나보냈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유원기의 처는 은근히 부아가 났다. 집에 돌아온 유원기를 잡고 타박을 했다.
“각자 자기 집이 있는데 어찌해서 항상 당신이 남의 집 일까지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이오?”
원기가 웃으며 말했다.
“저 아이는 우리 유씨 집안을 크게 일으킬 아이오. 장차 크게 될 것이니 부인은 아무 염려 마시오.”
유원기로서는 집안의 될 성싶은 아이에게 투자한 셈이었지만 어찌 알았으랴! 이 아이로 인해 집안에 덕이 되기는커녕, 평생을 숨죽여 엎드려 살아야 할 줄을...2)

구씨산중에서의 수학은 단순한 생활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가볍게 양생법을 수행한 다음 책을 읽었다. 조반을 먹고 나서도 쉼 없이 책을 읽었다. 주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읽었는데, 노식 선생은 가끔 나타나 경전의 깊은 뜻을 해석해 줄 뿐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오전에 배운 경전에 나온 장구 해석을 반복 연습하거나, 사서오경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외우는 일을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부지런히 학업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었지만, 유비는 그렇지 않았다. 책은 대강의 내용만 파악했고, 깊이 있게 자구를 해석하거나 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후에는 선생의 가르침이 없었으므로 주로 배짱이 맞는 친구들과 거리에 나가 어울려 다니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호협의 기질이 있거나 놀기 좋아하는 부잣집 도련님들이나 애초에 자질이 없어 학문적으로 대성하기가 어려운 학생들이 이런 부류들이었다. 덕연도 공부에 소질이 없었으므로 그저 유비를 따라다닐 뿐이었다. 유비를 따라다니면 사람들이 모였고 사람들이 모이면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생기곤 했다.

유비는 이 공손찬을 만났다. 공손찬은 자를 백규라 했고, 유비보다는 예닐곱이나 손위였다. 노식 문하에 공부하러 올 당시에 이미 요서군의 하급 관리 신분이었다. 게다가 그는 요서군 태수의 딸에게 장가를 든 태수의 사위였다. 그는 키가 크고 인물이 매우 잘 생겼다. 목소리도 우렁차고 미성이어서 보는 사람마다 흠모의 감정을 갖게 할 정도였다. 유비도 공손찬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에게 반했다. 공손찬은 잘났을 뿐만 아니라 기백이 있고 아랫사람들에 대한 통솔력이 뛰어났다.

원래 공손찬은 탁군에서 동북방으로 약간 떨어진 지역인 요서군 영지현3) 출신으로 아버지가 이천석의 수입을 가진 군내 제일의 부호였다. 그의 어머니는 용모가 아주 빼어난 미인이었지만 기생 출신이었다. 당시에 자식의 신분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되었으므로 공손찬은 천출이었다. 비록 대대로 이어져 오는 사대부 가문 출신이었지만 효렴으로 천거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공손찬의 아버지는 군수에게 재물을 바치고 청탁을 넣어 그를 군의 관리로 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어머니가 특별히 사랑받는 애첩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공손찬은 군의 하급관리로 일하면서 금새 두각을 나타냈다. 워낙 튈 정도로 인물이 빼어났을 뿐만 아니라, 말도 잘하고 일도 잘했기 때문이었다. 태수에게 하루에도 여러 번 군의 사무에 대해 보고하면서 한 번도 숫자가 틀리거나 업무에 착오가 없었다. 요서태수는 공손찬이 전도가 유망하다고 여겨 그를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 문벌이 지배하는 사회 풍조로 볼 때 거의 파격이었다. 태수는 공손찬을 키워주려는 마음이 있던 차에 마침 노식이 탁군에 학교를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보내어 노식 문하에서 수학하게 했다.

공손찬 역시 글을 읽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집과 군에서 보내주는 재물이 넉넉했으므로, 일과 시간 이후에는 떠들썩하게 몰려 다니며 말 타고 활 쏘며 놀기를 좋아했다. 자연스럽게 주변에 협기 있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중 하나가 유비였다. 유비는 공손찬이 나이도 위고 세상 경험도 많았으며 무엇보다도 여러 면에서 자신보다 잘났으므로 그를 형으로 받들었다. 공손찬도 유비가 과묵하지만 통솔력이 있고 사람이 진국이었으므로 그를 좋아했다. 유비는 공손찬을 따라다니며 말을 타고 사냥개를 부려 사냥도 하고 기방에 출입하면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음악과 풍류도 배웠다.

당시에 사족이면서 벼슬길에 나서지도 못하고 농공상의 생업에도 종사하지 않으면서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며 협행을 하는 이들을 소년 또는 소년배라 했다. 일종의 유협으로 관료로 출사하기 전인 사대부 가문의 자제들 중 호협, 방탕한 자들과 평민 출신이지만 생업에는 종사하기 싫고 뭔가 큰 것 한 방을 기대하는 젊은 야심가들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이 중 질이 떨어져 도적질이나 사기, 도박 등 주로 불법적인 짓을 일삼는 이들을 악소년이라고 했다. 이들과 달리 산중에서 강도짓을 업으로 삼은 자들은 녹림이라 했는데 이들은 모두 혼란한 세상이 오면 자신들의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고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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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훈고학(訓詁學): 경전의 자구(字句) 뜻을 바르게 풀이함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으로 후한 말 마융(馬融), 정현(鄭玄), 가규(賈逵) 등이 대표적 학자이다.
2) 저자 주: 유비는 황건적을 치러 고향을 떠난 후 한 번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다. 말년에 이르러서야 대장정에 필적할 정도로 중국을 한 바퀴 돌아 촉(薥)에 자리 잡음으로써 고향사람들은 적국인 위(魏)에서 숨죽이고 살아야만 했다.
3)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천안(遷安)으로 춘추전국시대에 고죽국이 있었던 곳이다. 이를 통해 요서군이 후한시절에 지금의 요령성과 하북성에 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자가 봉해진 조선이 고죽국이었다는 사료로 볼 때, 조선을 이은 낙랑군이 하북성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3) 손문대: 강동의 범 같은 장수

쾌청한 날씨였다. 강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와 푸른 언덕을 어루만졌다. 멀리 흰 구름이 둥실 뜨고, 전당강 가에는 오가는 배들과 짐을 싣고 부리는 배들로 북적거렸다. 부둣가에는 행인들과 짐수레가 분주히 움직였다.
그때 갑자기 요란한 북소리가 들리더니 상류 쪽에서 작고 빠른 배 몇 척이 쏜살같이 다가왔다. 누런 비단으로 돛을 해 달았다. 갑자기 혼란이 일어났다. 부둣가에 모였던 행인들과 짐꾼들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부두에 짐을 부리던 선원들도 황급하게 짐을 버리고 육지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강상에 여유롭게 항해하던 배들도 일제히 방향을 돌려 하류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악명 높은 호옥이 이끄는 해적 금범적(錦帆賊)이 나타났다. 호옥의 배들은 재빨리 배를 부두에 댄 다음 미처 도망가지 못한 배들을 강안에 붙잡아 둔 후 약탈을 시작했다. 몇 명의 성급한 해적들은 큰 칼을 휘두르며 행인과 짐꾼들을 추격했다. 잡히는 대로 한칼에 베어 죽이고 재물을 약탈했다. 뱃나루 한쪽에서 크게 불길이 일었다. 해적들이 대충 약탈을 마친 배에 불을 질러 버렸다. 기괴한 복장의 해적들이 기성을 지르며 기세를 올렸다. 아무도 대항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하류 쪽으로 대피한 배들은 멀리서 바라보면서 해적들의 노략질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상류 쪽의 배들도 감히 전진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뱅뱅 돌 뿐이었다.

언덕 위에 한 젊은 장수가 나타났다. 깃발을 흔들면서 손을 들어 이리저리 방향을 지시하며 군대를 지휘하는 듯했다.
“좌군은 언덕을 돌아 강 상류로, 우군은 크게 돌아 하류로, 중군은 언덕 사이에 매복한다. 내 수신호에 따라 일제히 합격하라.”
목소리가 종을 울리듯 우렁찼다. 봇짐을 들고 정신없이 도망치던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당당한 체구, 호랑이 가슴에 곰의 허리를 지녀 마치 한 마리 야수가 웅크린 듯한 모습이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어흥 소리를 내며 달려들 것만 같은 품세였다.

소동이 먼저 일어난 곳은 해적들 사이에서였다. 관군이 이렇게 빨리 출동할 줄이야... 어쨌든 범 같은 장수가 대군을 이끌고 당도한 것이 분명했다. 돈보다는 목숨이 우선이었다. 해적들은 빼앗은 물건들을 챙길 틈도 없이 허둥지둥 도망치기 시작했다. 뱃전에서는 두목인 듯한 자가 나타나 빨리 배에 오르라고 손을 마구 휘저었다.
해적들이 반 이상 배에 오른 순간 언덕 위의 장수가 벽력같은 기합 소리와 함께 긴 칼을 휘두르며 달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군대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적어도 해적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부녀자를 겁탈하거나 보퉁이를 안고 저항하는 자들과 실랑이를 벌이느라 늦게 도주하기 시작한 자들만 빼고는 모두 허겁지겁 배에 올랐다. 젊은 장수는 비호처럼 달려와 뒤에 쳐진 수적의 목을 향해 칼을 날렸다. 붉은 피가 길게 튀겨 올랐다. 간담이 오그라진 자들이 죽어라 달려와 뱃전에 매달리자마자 해적들의 배는 길게 항라 소리를 울리며 나루터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는 쏜살같이 달아났다.

장수는 넓은 공지 한가운데 우뚝 섰다. 한 손에는 피가 뚝뚝 흐르는 해적의 머리를 움켜쥔 채였다. 다른 한손으로 투구를 벗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시원스럽게 넓은 이마, 각진 턱, 한일자로 굳게 담은 입술에 형형한 눈빛이 도무지 겁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코밑이 거뭇거뭇할 뿐 턱수염도 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직 스물도 안 된 소년이었다. 제 짐을 찾고자 돌아온 사람들이 그를 보고 모두 찬탄해 마지않았다. 나이도 젊은 사람이 어찌도 저렇게 담력이 세단 말인가.

소년의 이름은 손견이었다. 자는 문대라 하고, 대대로 오군 부춘현에 살아왔다. 부춘현에는 손씨들의 집성촌이 있었는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전국시대 병법의 대가 손무의 후손이라고 했다.
손씨 집안의 선산은 부춘성 동쪽에 있었다. 하루는 무덤 위에서 이상한 빛이 뻗어 나오고 하늘까지 닿는 오색구름이 몇 리에 걸쳐 가득했다. 이런 일이 몇 번이고 계속되었다. 너무 이상한 일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러 몰려들었다. 동네 노인들이 서로 말하길, ‘이 기는 범상치가 않다. 장차 손씨 가문이 크게 흥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때마침 손견의 어머니가 임신을 했다. 그녀가 어느 날 태몽을 꾸었는데 자신의 몸에서 창자가 빠져나오더니 온 마을을 휘젓고 다니다가 급기야 오창문(吳昌門)1)에 이르러 성문과 문루를 칭칭 감아버리는 것이었다. 잠에서 깨어 보니 너무도 두렵고 불길한 꿈이었다. 주변에 꿈 해몽 잘하는 노파가 살아 그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노파는 ‘이 어찌 길한 징조가 아니라 할 수 있으랴!’ 하면서 매우 길조라고 해석해 주었다고 한다.

손견은 태어난 후 쑥쑥 자랐다. 용모가 비범하고 성격이 활달했으며 기개가 남달랐다. 나이 십칠 세가 되자 아버지를 따라 현청에서 아전으로 일하게 되었다. 손씨네는 본시 집안 대대로 오군에 거주하면서 향리로 일해 왔었다.
이날도 아버지와 함께 공물 실은 배를 타고 오던 참이었다. 마침 해적들이 전당강가에서 노략질하는 모습을 보고 손견이 아버지에게 청했다.
“저 적들을 능히 격파할 수 있습니다. 허락해 주소서.”
“네가 능히 해치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참아라.”
손견의 아버지는 호옥 일당의 악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아들의 무모한 행동을 자제시키고자 했다.
손견은 이를 듣지 않고 언덕 위로 뛰어 올라가 마치 많은 군대를 끌고 와 지휘하는 척 하였다. 적이 공황 상태에 빠져 도주하자 틈을 보아 돌격해 적 일인의 수급을 얻었다. 손견의 아버지는 크게 감탄해 마지않았다. 단순히 용맹한 줄만 알았던 그의 아들이 전장에서의 적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고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전당강가에서 호옥의 수적을 물리친 이야기는 널리 알려졌다. 관부에서 그를 불러 임시로 현의 치안책임자인 현위에 임명했다.

그 무렵 회계군 출신의 사이비 종교 지도자 허창이 구장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영제가 건녕원년(서기 168년) 불과 열두 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조정에서는 외척과 환관의 피 흘리는 정권쟁탈전이 다시 재개되었다. 환제 말기에 외척이었던 대장군 양기가 환관들에게 몰려 자살한 후 조정의 온갖 실권은 내시들에게 돌아갔다.
사대부들은 본래 내시들이 정권을 농단하는 것을 증오했으므로 외척의 편을 들었다. 사대부들의 비판이 심해지자 환관들은 사대부 출신의 관료들이 파당을 결성하여 황권에 대항한다고 모함해 주요 인사들을 모두 투옥하였다. 연희9년(서기 166년)의 일이었다. 이를 1차 당고의 금(黨錮之禁)이라 한다. 당고의 금 이후 아무도 환관들의 독재를 견제할 수 없게 되자 이들의 권력 독점은 극에 달했다. 심지어 황제의 위를 누구에게 계승시키느냐 하는 문제도 거의 전적으로 이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영제의 즉위 직후 환관의 독단이 너무 심하다고 느낀 황태후 두씨는 외척 두무를 대장군에 임명해 이를 견제하려 했다. 일시 정권은 대장군 두무와 사족의 대표인 태부 진번이 장악하였으나 일 년도 지나지 않아서 중상시 조절과 왕보의 궁정쿠데타에 의해 두무와 진번이 살해당하고 황후마저 유폐되었다. 조절을 위시한 내시집단은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건녕2년(서기 169년) 이응(李膺) 등 사족의 주요인물 백여 명을 사사하고 오륙백 명의 사족들을 조정에서 추방했다. 이것이 2차 당고의 금이다.

이처럼 조정이 정권다툼에만 골몰하는 동안 백성들의 생활은 피멍이 들었다. 대홍수가 일어나고, 지진, 해일 등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속수무책이었다. 급기야는 기근이 일어나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일까지 생겼다.
춘궁기에 하동군과 하내군에서는 부부가 서로 잡아먹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도처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났다. 건녕 2년 가을에 강하군에서는 남만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단양군에서는 산월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그 지역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건영3년에는 제남속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북방에서는 매년 겨울만 되면 선비와 예맥이 변방을 약탈해도 조정은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낙양에서 동남방으로 삼천이백 리 떨어진 오군 지방은 권력싸움으로 날을 세우는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관심과 혜택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유달리 재물을 밝히는 경향이 있는 환관 등 중앙정부의 수요를 충족하느라 각종 공물과 조세에 백성들은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기근이 발생하지 역병이 돌았다.
백성들이 의지할 곳 없는 이런 상황에서는 의례 사이비 종교가 창궐하게 된다. 허창은 치병치레를 하는 무속인이었다. 용하다고 소문이 나자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추종자가 늘자 그의 아들 허소가 대장군을 자칭하며 여러 현에서 주민들을 선동해 만여 명의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허창은 그에 의해 양명황제로 추대되었다.

단양태수 진인은 손견의 무용담을 듣고 그를 불러 군사마로 임명했다. 손견은 즉시 평소에 어울리던 소년배들을 중심으로 천여 명의 정예병을 모집했다. 손견은 양주자사 장민과 단양태수 진인 등이 이끄는 주와 여러 군의 군대와 함께 허창의 무리를 토벌하기 위해 나섰다. 손견은 항상 선봉에 서서 싸웠으며 허창의 무리를 격파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때가 희평원년(서기 172년)이었다.

양주자사 장민이 손견의 공로를 상주하자 조정에서는 손견에게 염독승의 벼슬을 제수했다. 염독승이란 염독현2)의 부현장으로서 중앙정부에서 임명하는 칙임관이었다. 군리나 현리와 같은 아전과는 신분이 달랐다. 낙양에서 한참 떨어진 동남쪽 변방, 강동의 범 같은 소년 장수가 드디어 중앙에 이름을 알리고 관료로 출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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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창문은 오군의 중심지인 오현의 성 남문이다. 오군 오현은 손권이 수도를 건업으로 옮기기 전까지 오나라의 수도였다.
2) 서주 광릉군의 한 현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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