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황건적의 난4.

황건기의(黃巾起義)

장량, 장보의 무리가 봉기를 재촉하는 이면에는 개인적인 야욕이 존재하고 있음을 장각이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자신은 늙고 병약해 갔다. 장각이 죽으면 교단은 현재의 세를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장량과 장보, 그 주변의 교단 지도자들은 장각이 살아있는 동안 세속적 권력을 확보하기를 원했다.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왕후장상에 열후가 되어 대대손손 떵떵거리고 살아보고픈 것이 저들의 심정이리라. 성공해도 결국은 새로운 조정 권신들과 탐관오리들이 될 뿐일 것이리라. 장각은 눈을 감았다.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아지못할 일이었다. 교단에 너무 많은 무리와 재물이 모였다. 권력이 생기고 교만해진 탓인가.

“경성에서 마원의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지 알아보게 사람을 보내야겠습니다. 누구를 보내야 할까요.”
중도에 객사에 이르렀을 때 장량이 물었다. 장각은 눈을 들어 객사로 문안 온 교단의 중진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제남 사람 당주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장각의 초기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상인 출신으로 재산을 크게 모은 사람이었는데, 시세에 기민하지만, 합리적인 사고를 지닌 자였다.
“당주. 그대가 낙양에 다녀오도록 하라.”
그날 밤 장각은 당주를 조용히 숙소로 불렀다. 대란이 일어날 것이다. 경성의 사정을 잘 살펴봐라. 과연 천하대란에 대처할 능력이 있는지. 마원의는 너무 믿지 마라. 허언이 심한 자이다. 내외가 동시에 일어날 수 있으면 성공 가능성이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어려울 것이다. 당주는 조용히 눈을 들어 장각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병색이 완연한 것이 얼마 오래 살 것 같지 않았다. 무모한 장량, 장보의 손에 교단이 넘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개벽을 결심하셨습니까?”
당주가 조용히 물었다.
“상황이 어찌할 수 없는 것 같구나. 시세를 보아 판단하겠다.”
장각은 혼란스러워했다.

그날 밤 장각은 또 악몽에 시달렸다. 남화노선이 나무 지팡이를 땅에 찍어가며 추상과 같이 호통을 쳤다. 한 손에는 태평요술을 들고 있었다.
‘장각아. 장각아. 이 책을 공부하여 하늘의 이치로 세상을 감화시키고, 백성들을 구제하라. 그러나 세를 이용하여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화가 네 몸에 미칠 것이다.’
장각은 몸을 번드쳐 자리에서 반쯤 일으켰다. 식은땀이 이마에 흘렀다. 억지로 다시 잠을 청했다. 또 꿈을 꾸었다. 누런 황룡이 몸을 감싸고 이마에 뿔이 돋는 모습이었다. 머리에 황제의 관을 쓰게 될지 머리에 칼을 쓰게 된다는 뜻인지 도무지 해석이 되지 않았다.

당주는 낙양에 도착했다.
낙양은 질서가 정연했다. 어떤 혼란의 조짐도 없었다. 환관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조정에는 절의 있는 선비들도 많았다. 경성 주변은 유능한 관리들에 의해 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었다. 도성과 황성을 지키는 금군은 정예병으로 병장기가 예리하고 갑주가 번쩍였다. 단경, 장환, 장온, 동탁, 황보숭, 주전 등 역전의 용사들이 즐비했고, 신진인 원소, 조조, 손견 등 여룡여호한 장수들이 즐비했다. 망조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낙양 주변의 역량만으로도 황건적의 무리는 가볍게 쓸어버릴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마원의와 모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봉서와 서봉의 무리는 존재감이 없었다. 환관들의 수효가 많다 보니 그들 간에도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다. 봉서가 비록 십상시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는 있지만, 황궁 내의 권력투쟁에서 조충, 장량, 건석 등 주류에게 밀려나 소외되고 있었다. 반전을 시도해 보기 위해 황건적의 세력을 이용해 보려는 것이 봉서 무리의 요량이었다.
낙양 주변의 태평교도를 통해 당주가 파악한 내용이었다. 봉기는 실패할 것이 명약관화했다. 세상에 혼란만 심화하고 백성들의 고통만 가중될 뿐이었다. 당주 자신이 평생에 일구어 놓은 재산과 일가도 풍비박산이 날 참이었다.


당주는 낙양에 도착하자 마원의를 찾지 않았다. 바로 궁성으로 가 모반을 고변했다. 당주의 상서를 받은 영제는 기민하게 대응했다. 영제는 본시 머리가 둔하지 않았다. 사리를 탐했을 뿐이었다. 영제는 태위 주장 등 삼공과 사례교위 주빈 등을 급히 소집한 후 삼공부의 관원들을 동원해 궁성을 시위하는 위사들과 함께 낙양에 거주하는 백성 중 장각의 교도 천여 명을 색출해 처형했다. 마원의는 체포되어 낙양의 저자거리에서 사지가 찢어지는 거열형을 받았다.
황제는 각 주와 군에 조서를 내려 성을 수리하고 수성에 필요한 기계를 설치하는 등 방어태세를 취하도록 명령했다. 자신의 처남인 하진을 대장군에 임명해 전군을 통솔하게 하고, 함곡, 대곡, 광성, 이궐, 환원, 정문, 맹진, 소평진 등 도성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고 있는 여덟 개의 관문에 도위1)1)각 군의 군사지휘관 를 배치해 방어하게 했다. 또 각지의 황건적을 토벌하기 위한 장수들을 선발하기 위해 조정 중신들을 모아 긴급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황제가 기주에 영을 내려 장각의 무리를 체포하게 한 것은 장각이 업성에 도착한 후였다. 대현량사 장각이 거사 모의가 탄로난 것을 안 것은 당초 봉기하기로 약정했던 3월 5일 하루 전날 밤이었다. 마원의가 처형되고 경성 내의 태평교도들에 대한 일제 검거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은 살길을 찾아 도망쳐온 신도들에 의해 장각에게 신속히 보고되였다. 이 소식을 처음 접한 순간 장각은 갑자기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불길한 예상이 현실화되었다. 봉기가 불가피하다면, 경성 안팎에서 일제히 일어나야 했다. 궁성 내에서도 내응이 이루어져 거사하는 순간 승패가 결정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천하에 대란이 일어나고 장각이 우려했던 바대로 반군과 정부군 간의 교전 사이에서 백성들에 대한 대량 학살이 불가피해졌다. 백성을 살리기 위해 도를 전하고자 했던 장각이 천하의 인민을 살육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니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실제에 비해 도술의 효과를 과장되게 선전하고 자신에 대한 신격화가 진행되는 것을 한 눈 감고 바라본 것은 도를 빠르고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이라고 합리화할 수 있었다. 파탄에 빠져 거리를 유랑하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재물을 모으고 교단을 조직화한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권력과 재물 욕심에 눈이 어두운 기회주의자들이 너무 많이 조직에 들어와 있었다. 이들 중에 간이 큰 자들은 교단의 증대된 세력에 편승하여 세상의 권력을 훔치는 일까지도 손을 대게 된 일이었다. 교단이 다른 마음을 보이지 않았다면 조정이나 지방 관료들이 괜히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을 리가 없었다.
결국은 내 탓이었다. 자신의 허영심과 욕망에 져버린 탓이었다. 일개 농민에서 수십만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 신처럼 추앙을 받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그 마력에 빠져 버린 것이나 아니었는지... 자신을 신격화하고 재물과 조직을 관리하는 주변 인물들에 의해 교단 내의 모든 권력이 자신에게 과도하게 집중되었지만, 어느덧 사실상 자신이 주변의 기회주의자들에게 조종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다 떨쳐 버렸어야 했다. 교단도 버리고, 재물도 포기하고 탁발하던 시절의 겸손한 마음으로 돌아갔어야 했었다. 그러나 권력은 너무도 영화로웠고 재물의 유혹은 너무도 강했다. 거사 계획이 탄로 난 순간 실패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상보다 정부의 대응은 신속했다. 장각의 신도들이 조직화된 정부의 군대와 맞서 싸워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생령들이 죽어나갈까. 장각은 지옥의 문이 자신의 손에 의해 열린 것을 보았다.

입술에 차가운 액체가 흐르는 느낌에 장각은 의식을 회복했다. 장보, 장량을 위시한 교단의 중진들과 각 방의 장군들이 자신의 침상을 둘러싸고 있었다. 우려 섞인 표정들이었다.
“형님. 정신은 돌아오셨습니까.”
비교적 사려 깊은 장량이 걱정했다. 장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량이 약봉지를 들고 서있던 의원을 나가게 했다.
“한시가 시급합니다. 형님. 인제 주저할 바가 없어졌습니다. 가만히 있다간 앉아 죽게 생겼습니다. 낙양의 신도들은 모두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일어나야 합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장보가 급하게 말을 마치자 대방의 장수들도 일제히 고개를 숙여 출정을 간청했다.
“형님. 너무 염려 마십시오. 아직도 기회는 많습니다. 이곳 업성에는 형주와 양주의 신도 삼만이 무장을 갖춘 채 모여 있고 경성 주변의 영천, 여남, 진국, 남양 등 예주와 형주의 각 군에는 각각 수만 명의 신도들이 이미 약조된 날짜에 일어나기 위해 준비를 마쳤습니다. 밤새 파발을 띄워 내일 아침 봉기한 다음 일제히 낙양을 향해 사방으로 진격한다면, 조기에 승부를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장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의가 탄로 난 것을 안 장각의 무리들은 밤을 새워 전국의 36방에 전갈을 보내 일시에 봉기하도록 했다. 업성에는 이미 삼만의 교도들이 모여 있었으므로 쉽게 성을 장악할 수 있었다. 봉기한 교도들은 머리에 누런 수건을 둘러 표식으로 삼았다.

누런 수건을 쓴 이유는 장각은 한나라를 화덕으로 보고 오행종시설에 따라 화덕을 토덕이 대치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화덕은 토덕은 상징색이 황색이다.1) 
세상 사람들은 장각의 반란군을 황건적(黃巾賊) 또는 의적(蛾賊)이라 불렀다. 누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개미떼처럼 그 수효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장각의 무리는 업성에서 봉기한 후 사람을 제물로 바쳐 하늘에 제사 지낸 후, 장각은 천공장군(天公將軍), 장보는 지공장군(地公將軍), 장량은 인공장군(人公將軍)을 자칭했다.

황성인 낙양을 둘러싸고 있는 예주에서의 싸움이 전체의 승패를 좌우할 것이므로 지공장군 장보가 총지휘를 맡기로 했다. 연주에서는 동군 대방의 거수 복기가 무리를 이끌고 서진해 장보를 지원하기로 했다. 남양 대방의 거수 장만성에게는 남쪽으로부터 낙양을 공략하라는 지시가 전달되었다. 장각은 인공장군 장량과 함께 업성에 남아 북쪽에서 황성을 압박하며 전체적인 전황을 지휘하기로 했다.

밤을 새워 파발은 달려나갔다. 업성에 모여 있던 예주 영천 대방의 수령 파재와 여남 대방의 팽탈도 자신의 무리들에게 돌아갔다. 업성에서 각 지방의 대방까지는 수백리가 넘는 거리였다. 파발이 말을 바꿔 타며 달렸어도 2~3일이 걸렸다. 실제로 황건적인 일제히 일어난 것은 3월 7일이었다.
황건적은 여덟 개 주에서 동시에 봉기해 관부를 불태우고 취락과 성읍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혹독한 폭압과 수탈에 허덕이던 각 주, 군의 일반 백성들과 고향을 잃고 떠돌던 유랑민들, 각지에 할거하던 도적들까지 합세하여 자신이 거주하는 주와 군을 공격했다. 각 주와 군의 근거지가 함락되자 자사, 태수 등 지방장관들과 그 속관들은 성을 버리고 도망하는 자가 많았다. 난을 일으킨 지 열흘 만에 천하가 호응하여 경성(京城) 주변까지 놀라 들썩이게 되었다.
먼저 형주의 황건적 장만성이 남양군을 급습하여 남양태수 저공을 죽였다. 장만성은 스스로 ‘신상사(神上使)’라 칭하며, 무리가 수만에 이르렀다. 이들 무리는 남양군의 소재지인 완성을 근거지로 남양 일대를 백여 일간 휩쓸었다. 영천의 파재는 장사를 근거지로 한 후 낙양을 향해 진격했다. 여남의 팽탈은 소릉에서 여남태수 조겸이 이끄는 관군을 격파했다. 기주에서는 업성을 점거한 후, 장각의 고향인 거록군과 광종, 하곡양을 점거했다. 유주의 황건적은 유주자사 곽훈과 광양태수 유위를 죽이고 광양을 점거해 기세를 올렸다.

조정의 공경대신들은 황건적을 토벌할 장수들로 황보숭과 주전, 노식, 동탁 등을 추천했다. 황제는 황보숭과 주전을 좌,우 중랑장으로 임명하여 낙양에서 인접한 예주의 황건적을 토벌하도록 조명을 내렸다. 노식은 북중랑장으로 임명하여 기주와 유주의 황건적으로 토멸토록 했다. 동탁은 동중랑장으로 임명하여 연주, 청주를 향하도록 했으나 천천히 전진하면서 황보숭과 주전, 노식을 후원해 주도록 명했다. 일종의 예비 병력이었다.2)

조신회의가 열리자 황건적의 토벌 임무를 맡은 좌중랑장 황보숭이 앞으로 나아와 황제에게 건의를 올렸다.
“먼저 당고의 금에 처해진 명사들을 해금해 조정으로 돌아오게 해야 천하의 민심이 안정될 것입니다. 민심이 안정되지 않는다면 도적을 토벌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오히려 도적의 세력만 불어날 것입니다. 또 군대를 제대로 무장시키기에는 군자금이 부족합니다. 중장부(中藏府)3)의 금전을 내려주시어 군자에 보태게 해야 합니다. 서원(西園)4)의 마굿간에 있는 말들도 다 군사들에게 넘겨주시어 전력을 보강토록 해야합니다.”
황제는 생각보다 명민했다. 황보숭은 출정에 앞서 사족들의 여론을 대변하고 있었다. 난이 일어났으니 그동안 해 먹었던 것을 다 내놓으라는 것 아닌가. 평소라면 어림없을 소리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황제는 황보숭의 건의를 흔쾌히 수용했다.
황제는 도성 밖에 주둔하고 있는 오교위(五校尉)5) 소속 군사와 삼하(三河)6)에서 급히 징발한 기사와 정예병을 합해 도합 4만 명의 정병을 황보숭과 주전에게 통솔하게 했다. 또한 황보숭과 주전에게는 지절7)을 하사해 황제를 대리하여 이천석급8) 이하의 관원과 백성들을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수여했다. 황보숭과 주전은 군사를 나누어 각각 군을 이끌고 영천의 황건적을 향해 진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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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양오행설은 전국시대 음양가인 추연(騶衍)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추연은 오행상극설에 따라 여러 왕조의 덕을 배열했는데 우(虞) 임금은 토덕(土德), 하(夏) 나라는 목덕(木德), 은(殷)나라는 금덕(金德), 주(周)나라는 화덕(火德)에 근거해 나라를 세웠다고 주장했다. 오행상극설은 수극화(水剋火), 화극금(火剋金), 금극목(金剋木), 목극토(木剋土), 토극수(土剋水)의 이론에 따라 오행의 순환 순서를 토목화금수(土木金火水)로 본다. 음양가의 이론에는 오행상극설 이외에도 오행상생설이 있다.

오행상생설(五行相生說)은 상생의 순서를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으로 보아 오행의 순서를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로 정의한다.

한나라를 화덕으로 보는 이유는 한고조 유방이 팽택에 들어갈 때 흰 뱀을 벤 일화에서 유래했다. 유방이 지나가고 난 후, 부하들이 흰 뱀을 벤 장소에 도착했을 때 한 노파가 울고 있어서 그 이유를 묻자, 적제의 자식이 백제의 자식인 자기 아들을 베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는 고사에 근거해 한나라가 화덕에 근거해 일어났다고 했다. 화덕의 상징색이 적색이기 때문이었다. 백색은 금덕을 상징하는 것으로 금덕에 이어 화덕이 득세한다는 것은 오행상극설을 따른 것이다. 반면에 장각은 오행상생설에 따라 화덕을 토덕이 잇게 된다고 주장했다. 


2) 중랑장(中郎將)은 황제의 호위와 궁중의 경비를 담당하는 광록훈에 속한 녹봉 비이천석의 무관직으로 금군을 지휘했다. 오관, 좌, 우, 호분, 우림의 5중랑장이 상설되어 있었다. 이 중 좌, 우 중랑장을 영천의 황건적 토벌에 파견하면서, 임시로 북, 동 중랑장 직을 신설한 것이다.


3) 중장부는 황제가 매관매직을 통해 개인적으로 치부한 금전을 쌓아놓고 있는 궁전 내 창고의 명칭이다.


4) 서원(西園)은 황제의 후원으로 황제가 뒷구멍으로 거두어들인 돈이 너무 많아 중장부에 다 보관할 수 없자 서원 안에 별도의 창고를 지었다. 서원 내에는 황제의 전용 마굿간이 있었는데 물욕이 유난한 황제는 이곳에도 천하의 양마를 많이 모아놓았다. 


5)황성인 낙양을 수비하기 위해 상시 주둔하고 있는 부대를 지휘하는 장수들. 둔기(屯騎), 보병(步兵), 월기(鉞騎), 장수(長水), 사성(射城) 등 5 개 교위가 있었다. 


6) 낙양 주변 하남, 하동, 하내 3 개 군, 즉 경기지방


 7) 절(節)은 8척(尺)의 자루에 깃털이나 쇠꼬리를 단 깃발의 일종으로서 황제의 군통수권을 상징하는 의장용 물건이다.


8) 9경 및 중랑장, 군 태수의 녹봉이 이천석이었으므로, 이천석급의 관리는 고위직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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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 주필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