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의 정치, 이번 선거에서 사라져야 한다.

▲이경주 뉴스젠 발행인

배신의 정치란 말은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유승민 당시 여당 원내대표가 국회에서 당 대표연설을 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인 증세 없는 복지정책을 정식으로 반박하면서 야당으로부터 박수를 받았던 일로부터 대통령의 말을 통해 나왔고, 결국 그는 대표직에서 물러나고 이로 인해 친박과 비박 간 갈등의 골을 키웠다.

이런 말이 나온 이유에는 한국정치의 특성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문화는 명분에 기반하고 있다. 이는 유교 분파 중 가장 교조적인 성리학을 숭배했던 조선시대 더욱 도드라졌다. 조선시대 '배원친명(排元親明)' 외교나 조선 현종 때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趙大妃)의 상례(喪禮)를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다툰 '예송논쟁(禮訟論爭)'은 대표적인 명분의 정치였다.

명분의 정치는 의리와 이율배반의 관계에 놓일 경우가 많다. 명분을 내세우면 의리를 지키기 어렵고, 의리를 지키려면 명분을 버려야 할 때가 많다는 뜻이다. 한국 정치에서 유독 배신이 많은 것은 이런 정치문화 때문인 탓도 크다.

배신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인간적인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평가는 매우 혹독하다.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는 은전 30냥에 예수를 배반,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다는 배신의 화신이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 하늘나라의 왕인 예수를 배신한 유다와 함께 지상의 제왕인 카이사르를 암살한 부르투스와 롱기누스는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서 얼음 속에 고통스럽게 갇혀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배신의 대가가 그만큼 무섭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배신의 대가는 정치에는 그다지 잘 통하지 않는 것 같다.

무슨 말이냐면 배신이 판치는 선거에서 이기고 나면 배신이란 말이 눈 녹듯 사라진다는 것이다. 어떤 선거든 선거가 끝나면 항상 나오는 말이 있다. ‘선거때는 국민과 지역주민을 위해서 머슴처럼 일하겠다고 고개를 숙이던 후보자들이 당선되고 나면 허리가 빳빳해지면서 상전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국민과 유권자에 대한 배신이다. 다시 말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지만 권력을 취하고 나면 국민이든 유권자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말도 들리지 않고 오로지 권력유지에만 힘쓴다는 말이다.

필자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있다. ‘정치가 권력을 추구할 때, 정치의 세계는 교활하고 비정해 진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된다.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 이게 무슨 소린가. 권력을 위해서라면 배신도 야합도 서슴없이 자행하겠다는 말 아닌가.

정치란 개인의 출세와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뚜렷한 국가관과 애국심을 갖고 國利民福(국리민복)의 대의를 품고 공의로운 처신을 해야 한다고 본다. 자기의 정치소신에 부합하는 당에서 그 당의 성공을 위해 뭉쳐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저 권력을 위해 정치적 주관이 없이 당을 배신하고 자기의 유익만을 따라가는 배신과 야합이 난무하는 저급정치는 반드시 뿌리뽑혀야 할 것이며 정도정치가 이 나라에 뿌리 내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의 심판이 필요하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선거일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유권자 여러분이 신중하고 현명한 판단을 통해 한표를 행사한다면 국민을 기만하고 유권자를 배신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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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