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황건적의 난 이후1

장각의 죽음

기주, 유주 등 북방의 황건적 토벌은 북중랑장 노식1)이 맡았다. 유비가 한때 스승으로 모시고 그 밑에서 공부를 했었듯이 노식은 원래 학자였다. 마융의 제자로 후한말 훈고학의 대가 정현과 동문수학했었다. 하지만 키가 8척 2촌으로 거구였고 목소리가 우렁차 문무를 겸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타고난 무장은 아니었으므로 조정에서는 호오환중랑장2) 종원에게 그를 돕게 했다.
노식과 종원은 군대를 이끌고 황건적의 본영이 있는 위군
으로 진격했다. 노숙군은 장강의 직계부대를 수차례 격파하고 만여 명의 목을 베었다. 장각은 견디지 못하고 업성(鄴城)을 버리고 자신의 고향인 거록(鉅鹿)군 광종(廣宗)으로 도망쳤다.
장각이 반란군 지휘부를 장보, 장량도 패잔병을 이끌고 광종으로 왔다. 각지의 황건적 잔당들이 모여들어 다시 군세가 회복되었다.

노숙이 추격해 광종성을 포위했다. 노숙은 광종의 황건적이 수가 많고 악에 받친 것을 보고 성을 포위한 후 장기전에 들어갔다. 우선 성을 에워싸고 참호를 파고 보루를 세워 포위망을 구축하고 나서는 운제와 충차, 횃불 등 공성기구를 준비했다.
장각이 성 위에 올라 형세를 관찰했다. 포위망은 철벽과 같았다 보루와 참호는 높고 깊었고 그 외곽에는 이중으로 녹각을 벌려 세우고 마름쇠를 깔아놓아 도저히 돌파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성안에는 일시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오래 버티기에는 군량과 마초가 부족했다. 영천과 여남의 황건적은 완전히 격파되었다 하고 남양의 무리도 수세에 몰리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미 그를 따르던 수많은 황건교도은 각 지방에서 모조리 잡혀 처형되고 있었다. 외부에서 올 원병은 없었다.

장각은 그동안 수차례 접전을 치루면서 관군이 예상외로 강하다는 것을 느꼈다. 업성에 모였던 황건적은 봉기한 세력 중 가장 강하고 준비도 잘 되어 있었으나 노숙의 군대에 연전연패했다. 노숙이 지휘하는 관군은 잘 정비되어 있었고 군기가 강했다. 질서가 정연한 것이 마치 철벽과 같았다. 첩보에 따르면 노숙이라는 지휘관의 인품과 능력이 훌륭해 병사들이 믿고 따른다 했다. 영천의 황건적을 토벌한 황보숭과 주전도 매우 유능한 장수들이라고 했다. 도대체 부패하고 무능한 자들만 가득했던 것처럼 보이던 조정에 어찌 저런 인물들이 있었단 말인가. 인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충분히 활용하지 않았을 뿐이었을까.
답답했다. 심장이 꽉 죄어오는 느낌이었다. 장각은 갑자기 다시 심장발작을 일으켜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시위들이 관부에 마련된 거처로 급히 옮겼으나 장각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장각은 며칠째 병상에 누운 채 고통스러워했다.
이 방법밖에 없었을까. 그의 무의식 속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이었다.
한나라 왕조는 이미 국가의 기능을 상실한 상황이었다.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지 못했고, 내부적으로도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질서를 유지하지 못했다. 특히 조세와 공부를 거두어들이는데 절도가 없어서 무한 수탈을 반복하니 백성들은 생존의 위기에 내몰려 고향을 등지고 유랑하거나 도적떼의 무리에 가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백성들이 천천히 말라 죽어가는 상황에서 뭔가 변화가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대규모 반란이나 폭동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황제와 환관, 그 주변의 간신배들이 스스로 잘못을 고칠 가능성은 없었더라도 수십, 수백만의 생령을 앗아가는 방법이 아닌 다른 길은 없었을까. 장각이 배운 도는 이런 도는 아니었다. 자신이 배운 바대로 지속적으로 노력했더라면 적어도 몇 사람의 생명을 더 살리면 살렸지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세상을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각은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약초를 찾아 산을 헤집고 다니고 남화노선을 만나 도를 배우던 시절을 떠올리며, 장각은 서서히 숨을 거두었다.

노숙은 포위망을 완성하고 나서 적이 지치기를 기다렸다. 황보숭과 주전이 연전연승하고 있는 반면, 기주에서 승전보가 올라오지 않자 조정에서는 소황
(小黃門) 좌풍을 보내어 전황을 살펴보게 했다.
노숙으로부터 자세한 전황과 적을 깨뜨릴 방안에 대해 설명을 들은 좌풍은 충분히 이해한 듯 부드러운 미소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좌풍이 물러간 후 참모들과 군자금 담당 관리가 노숙을 찾았다.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노숙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군자금 담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황문에게 인사치레를 해야 할 텐데 얼마쯤 마련하면 되겠습니까?”
지레짐작은 해지만 이것 때문이었구나. 지방에 감찰을 나오는 환관들에게 뇌물을 바쳐 입막음을 하는 것은 오랜 관행이었다. 그러나 노숙은 국가에 대란이 일어난 상황에 군지휘관에게까지 손을 벌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나라에서 받은 군자금도 넉넉치 않아 군사들에게 충분히 보급을 해주지도 못하고 있었다.
“병사를 먹일 양식도 충분치 않은데 무슨 돈이 있어 뇌물을 준단 말이냐.”
노숙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앙심을 품은 좌풍은 환궁해 영제에게 보고했다.
“광종의 황건적을 깨드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노중랑장이 보루만 지키면서 병사들을 쉬게 하고 있기 때문에 승전소식이 없는 것입니다. 싸움을 피해 적을 키우고 있으니, 마치 하늘이 대신 벌을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제는 매우 화가 나 노식을 잡아들이도록 명했다. 노식은 함거에 실려 잡혀들어왔다. 응당 사형감이었으나 중신들의 만류로 죄를 감하여 처형만은 면할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동중랑장 동탁을 보내 노식을 대신하게 했다.

동탁(董卓)

동탁은 자가 중영(仲穎)이고,농서(隴西)군 임조(臨洮)현 출신이다. 아버지는 미관말직으로 시작해 영천군 수지(輪氏)현의 현위3)를 지냈다. 동탁은 소년 시절부터 협객 기질이 있어 호방해 늘 강족(羌族) 부락으로 놀러 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는 여러 강족 수령과 호걸들과 결의형제를 맺기도 했다.
동탁은 성인이 되자 가정을 이룬 후 들판에 농사를 짓고 살았다. 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척민 생활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 함께 어울리던 강족 수령들이 부하들을 이끌고 동탁을 찾아 왔다. 밭에서 돌아온 동탁은 그 자리에서 밭 갈던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동탁의 의리와 호기에 감동한 강족 수령과 호걸들은 각자 몇 마리씩 추렴해 여러 종류의 가축 천여 마리를 동탁에게 답례로 보내 주었다. 이 일로 동탁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관직을 얻는데 밑천이 될 재산도 마련하게 되었다.
동탁은 농서군의 관리를 거친 후, 량주의 병마연(兵馬掾)이 되어 변방 요새에 근무하면서 순찰과 요격을 담당했다. 그 당시 호족(胡族)이 출몰하면서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곤 했다. 한번은 동착이 기병을 이끌고 추격해 호족을 대파하고 천여 명의 목을 베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후한 시대에는 서량의 여섯 개 군의 양가집 자제 중에서 무용이 뛰어난 자를 선발해 황제의 호위병인 우림랑(羽林郎)으로 임명하는 전통이 있었다. 동탁은 환제 말년에 우림랑으로 선발되었다. 그가 협객 행세로 이름이 높았고, 강족과 호족이 모두 두려워할 정도로 무술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동탁은 보통사람보다 월등히 힘이 세었으며, 양쪽에 화살통을 차고 말을 달리면서 왼쪽, 오른쪽으로 마음대로 활을 쏠 수 있었다.
그 후 중랑장 장환(張奐)이 량주(凉州) 한양(漢陽) 군에서 반란을 일으킨 강족을 칠 때 군사마(軍司馬)로 종군해 적을 격파했다. 그 공으로 랑중(郞中)에 임명되었다. 비단 9천 필을 상으로 받았으나 모두 휘하 부하들과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을 위해서는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얻기를 좋아하니 어디에 가나 항상 그를 추종하는 패거리들이 생겨났다.
동탁은 광무(廣武) 현령,촉군북부도위(蜀郡北部都尉),서역무기교위(西域戊己校尉),병주자사(并州刺史)를 거쳐 황건적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하동태수(河東太守)의 직에 있었다.
황보숭과는 같은 량주 출신이었지만, 더 빈한한 가문 출신이었다. 성격도 대조적이었다. 황보숭은 조심스럽게 본분을 다하는 형으로 매사에 원칙적이고 투명했으나, 동탁은 성정이 거칠고 용맹하면서도 권모술수가 뛰어났다. 부하를 아끼는 방식에서도 달랐다. 황보숭은 동고동락하며 부하들의 수고를 덜어주었지만, 동탁은 목적달성을 위해 부하들을 몰아치지만 일단 이익을 얻으면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편이었다.

동탁은 노식을 대신해 군 지휘를 맡은 후, 즉시 강공에 나섰다. 궁지에 몰린 황건적은 죽을힘을 다해 반격에 나서자 동탁군은 참패했고 포위망이 무너져 버렸다. 이 틈을 타고 지공장군 장보는 일군을 이끌고 성을 탈출해 하곡양(下曲陽)으로 달아났다. 장보는 유주 남부의 황건적과 연합해 광종에 남아 있는 장량의 군과 협공태세를 취했다.

패전 소식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동탁은 노식처럼 처벌받지 않으려면 급하게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광종의 황건적은 최정예였고 사지에 몰려있었다. 동탁이 휘하의 적은 병력으로 제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어쨌듯 동탁은 패전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았다.
마침 황보숭이 연주의 황건적을 모두 토벌했다.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황보숭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장보, 장량 등의 황건적을 토벌하도록 명했다. 황보숭이 군을 이끌고 도착해 인공장군 장량과 광종에서 싸웠다. 장량의 황건군은 정예하고 용맹해 황보숭군이 이길 수 없었다.
다음 날 황보숭은 영문을 폐쇄하고 병사들을 쉬게 하면서 상황변화를 살펴보았다. 초전의 승리에 자만한 적이 다소 해이해지는 모습을 보이자 황보숭은 한밤중에 몰래 군사를 내어 야습을 했다. 첫 승전에 도취해 아무런 대비가 없었던 황건적들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황보순 군은 닭울음소리가 울릴 때 적진에 뛰어 들어가 신시(申時)6)까지 싸웠다. 황보숭 군에 의한 일방적 살육이었다. 적의 수괴 장량을 비롯하여 삼만여 명의 목을 베었다. 강을 건너 달아나다 빠져 죽은 자가 또한 오만여 명이었다.
난공불락이었던 광종성은 황보숭의 일격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관군은 광종을 함락한 후 황건적이 보유하고 있던 차량과 치중 삼만여 량을 불태워버렸다. 황건적 무리의 부녀자들은 다 포로로 잡았다. 그 수효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장각은 이미 사망했으므로 부관참시7)하고 그 목을 경성으로 보냈다.
황보숭은 다시 북진해 좌풍익 출신인 거록태수 곽전과 함께 하곡양에서 인공장군 장보를 공격했다. 역시 장보를 참수하고 십만여 명의 머리를 베어 성 남쪽에 시체를 산처럼 쌓은 후 그 위에 흙을 덮어 경관(京觀)을 조성했다.
조정에서는 즉시 이 대단한 전과를 치하해 황보숭을 좌거기장군(左車騎將車) 겸 기주목(冀州牧)으로 승진시켰으며, 현후 급인 괴리후(槐裡侯)에 봉하고 우부풍군의 괴리현과 미양현 2개 현 도합 팔천 호의 식읍을 하사했다.
황보숭은 조정에 노식이 행했던 군사전략을 극구 칭찬하고 그가 준비한 장비와 자재를 사용하여 공을 이룰 수 있었다고 보고해 했다. 이 덕에 노숙은 상서(尚書)로 복직되었다.
이로서 황건적의 주력이 완전히 괴멸되었고, 나머지 황건적들도 각 주와 군의 관원들에게 붙잡혀 모두 주살되었다. 그 수효는 각 방마다 수천 명에 달했다.

-----------------
노식(盧植)은 자를 자간(子干)이라 하고 탁군(涿郡) 탁현 사람이다.
노식의 스승 마융은 명덕황후(明德皇后)의 조카였으므로 집안이 부유했다. 마융은 학문을 가르칠 때 강당 좌우에 예쁜 기생들을 배치해 노래와 춤을 추게 했다. 노식은 몇 년 동안 공부하면서도 한 번도 고개를 돌려 미녀들을 바라보지 않았다. 마융이 그의 강직한 성품을 높게 평가했다 한다.
노식은 건녕(建寧) 연간(168~172년)에 박사(博士)가 되었다가, 희평(熹平) 4년(175년)에 구강(九江)의 만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구강태수에 임명되어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널리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얻었으나 상을 당해 고향에 돌아왔다. 노식은 상을 마치고 의랑(議郎)으로 있다가 북중랑장으로 발탁되었다.

호오환중랑장(護烏桓中郎將): 북방의 오환족을 관리 감독하는 무관직.

위군(魏郡): 기주의 한 군. 후일 조조의 근거지인 업성이 위군에 있었기에 그가 위공, 위왕에 임명된다. 위나라의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소황문(小黃門): 중상시 산하의 녹봉 육백석 급의 환관. 영제는 전선의 지휘관들을 감독하는 일에도 측근 환관들을 주로 활용했다.

현위: 칙임관으로 현의 치안담당자. 현은 한나라 지방행정기관으로 인구가 1만 이상이면 현령, 1만 미만이면 현장을 두었고, 현령 또는 현장 밑에는 부현장급인 현승과 현의 치안담당자인 현위가 있었다.

오후 세 시부터 다섯 시까지의 사이

이미 죽은 자의 관을 부수고 시체를 꺼내 목을 참수하는 형벌

<저작권자 ⓒ 뉴스젠,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장윤정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