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최초 박사 윤치형


윤치형(1896~1970)은 한국인 최초 박사이자 의학박사이다. 《매일신보》 1924년 6월 11일자에 윤치형의 의학박사 소식을 크게 보도했다.

▲조선최초의 청년 의학박사
   경성의전출신 윤치형씨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에는 박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윤치형은 두 가지의 박사 기록을 세운 것이다.
그는 1918년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의전)를 졸업하고 총독부 관비생으로 큐슈 제국 대학의 제2외과에서 근무하다가, 1922년 독일의 푸레스라우대학에 유학하였다.
그는 1924년 큐슈 제국 대학에 복귀하여 의원으로 일하던 중 일어와 독일어로 쓴 『건강 폐와 폐결핵에 미치는 기흉(氣胸)의 작용』으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성의전이 생긴 이래 최대의 경사가 생긴 것이다. 윤치형은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태어났다. 독립소학교와 명명중학을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경성의학전문학교는 당초 1899년 조선의 의학교였는데. 1910년 일본이 조선 왕권을 침탈하면서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교로 관리하다가 1916년 2년제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 했다. 흔히 경성 의전이라고 불렀다.
1909년 제중의학교에서 명칭을 바꾼 세브란스 의학교가 있었지만, 경성의전은 관립이라는 특성 때문에 사립 세브란스 의학교보다도 압도적인 선호도를 보였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의 최상위권 학생과 일본 본토의 명문 고보, 평양과 대구, 함흥과 광주 등에서도 지망자가 많았다.
윤치형이가 경성의전에 입학했을 때 학생들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물론 교수도 모두 일본인이었다. 그러다보니 한국 학생에 대한 차별이 심해 도중에 그만 둔 학생들이 속출했다.
윤치형은 의사가 되어 병든 환자들을 치료하겠다는 일념으로 의학 공부에만 매달렸다. 1918년에 경성의전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 당시에는 의사자격증이나 의사면허제도가 없었고, 경정의전 졸업장만 있으면 의사가 되던 시절이었다.
1920년 함경북도 성진 가나다선교사가 경영하는 여수교병원 외과부장으로 취임하여 임상 연구를 하였다.
1921년 4월 경성으로 돌아와 인사동에 외과의원을 개업해 일반인을 진료하면서 창상의 원발성 봉합법을 발명하였다.
1922년 독일 푸레스라우 대학(현재는 폴란드의 브로츠와프 대학)으로 유학하여, 추트낼 교수의 해부학교실에서 유선암종 근치 수술법과 내과학교실과 병리학교실에서 폐결핵 수술법을 연구했다.
총독부 관비로 1924년 1월 일본 규슈제국대학으로 유학하여 외과에 근무하면서 논문 『혈청단백의 정성 및 정량법』, 『위와 장의 원발성 육종』을 발표했다.
이어서 6월에 『건강폐와 결핵폐에 미치는 기흉의 작용』 의 연구 논문을 제출하였는데, 교수회의를 무난히 통과하여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의학박사가 되었다. 금의환향하여 모교인 경성의전 교수에 취임했다.
1926년 경성의전 교수직을 사임하고 관훈동에 개인병원을 개설, 연구를 계속하여 결핵약 ‘데이진’과 광견병 특효약 ‘넬츠운진’ 등을 발명하였다.
1970년 10월 2일 향년 76세로 숙환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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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정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