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대한민국 박사1호 3인

이학박사 1호 전풍진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의해 조선왕조가 무너지고 36년 동안의 일제강점기로부터 광복을 맞은 1945년 8월 15일에서야 대한민국의 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역사적인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1952년 4월 26일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국호에 의해 제정한 교육법 시행 학위 규정에 따라 승인을 받은 최초의 대한민국 대학교 이름의 박사 학위가 수여되었다.
이날 이학박사 3명(전풍진, 김동일, 원태상), 의학박사 1명(이춘근), 문학박사 2명(김두헌, 이병도) 등 6명에게 총장 최규남과 대학원장 윤일선이가 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그중 분야별 박사 학위증에 제1호로 표기된 박사 1호는 이학박사 전풍진, 의학박사 이춘근, 문학박사 김두헌 등 3명이었다.
이들 3명은 최초 대한민국의 박사 중에 박사 1호로 개인의 명예이자, 대한민국의 박사 제도 원년의 상징 인물이 되었다. 그런 상징으로 제1호 박사 학위기는 근대문화재 유물로도 가치가 큰 것이다.

전풍진(1909.12~1992.2)은 최초 이학 박사 1호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09년 12월 12일 서울 인사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중국무역상을 경영한 까닭으로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여덟 살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한사코 실업고등학교 진학을 권유하였지만, 전풍진은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선택했다.
아버지의 권유를 마다하고 공업고등학교를 선택한 까닭은 1925년에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된 《여공애사》를 읽고 나서였다.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일본처럼 공업을 일으켜 세워야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잘 살게 된 것은 어업도, 농업도, 상업도 아닌 공업이었음을 강조한 책이었다.
가난한 농촌의 젊은 여성들을 방적공장의 여공으로 모집하여 가혹한 저임금 집단노동을 강요하여 공업을 발전시켰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공들은 공장생활을 통해 여러가지 정보를 몸에 익히고 교양도 쌓아 고향으로 돌아가 종전보다는 더 잘 살게 되었다는 당시의 여공 주제 논픽션 이었다.
《여공애사》는 먼 훗날 한국의 구로공단과 청계천의 봉제공장에서 여공들을 모집하여 그대로 답습하기도 하였다.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한 전풍진은 일본인 선생 니시까와의 추천으로 경성제대 의학부 의화학과 조교가 되었다.
처음에는 한국인데다 전문학교출신이라서 박대가 심했으나 이왕 조교가 된 김에 열심히 교수들을 뒷바라지하며 학업에만 매달리기로 했다. 그런 노력으로 총독부의사면허시험 1차와 2차를 1년 반 만에 통과하여 주위를 깜짝 놀라게도 했다.
이런 계기로 본격적인 공학을 배우기 위해 오사카제국대학 응용화학과에 유학했다. 1933년 당시 오사카제국대학의 유일한 한국인 학생이었던 전풍진은 언제나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경성제대 의학부 때 조교 경험을 살려 매번 좋은 성적을 나타내자 당시 일본섬유소공학의 1인자였던 마르자와 교수로부터 본격적인 학문연구지도를 받았다.
대학원 재학 중에 마르자와 지도교수가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부총재 겸 중앙시험소 소장으로 가게 되자, 전박사도 만철시험소 기사 자격으로 따라 갔다.
만철에서 8년 동안 펄프제지에 대한 과학적연구조사에 매달렸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삼림자원이 풍부하면서도 종이 생산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반면에 일본은 섬유 제지로 부강해졌고, 일본 재벌들 가운데 종이업자가 많았던 것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고국으로 돌아가 종이 생산에 기여를 하고 싶다는 소망은 꺼지지 않았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194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아직은 신생국가이다 보니 대학교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고는 하나 교수로서 직위를 갖추기에는 스스로 미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교수라고 하면 박사 학위가 있어야 된다는 당연한 생각으로 그동안 연구했던 펄프제지에 대하여 논문을 쓰기로 했다. 우리나라 산의 참나무 삼림자원을 종이와 펄프로 연결시키려는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논문 『활엽수 펄프화에 관한 연구』가 서울대학교 대학원위원회에 통과하여 ‘이박 제1호’로 최초 대한민국 이학박사가 되었다.
1946년부터 1956년까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와 공과대학장 등을 수행하면서 1954년에는 대한민국학술원이 되었다.
1967년부터 한국펄프·종이기술협회 창립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68∼1984년까지 한국펄프·종이학회 제2∼제8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1957년부터 한양대학교 공과대학으로 옮겨 대학원장을 지내다가, 1976년부터 광운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겸 학장과 대학원장 등을 수행한 뒤 1992년 퇴임하였다.
오로지 종이와 펄프 연구 외길로 살다가 1992. 9. 12일 이공학 박사 1호 전풍진 박사는 숙환으로 83세 생을 후회없이 마감했다.

<저작권자 ⓒ 뉴스젠,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장윤정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