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초의 여성박사 송봉신..

「-여의박 송복신양
6년간 미국 유학 마치고 금의환향으로 귀국하여-

평양에는 1903년 10월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에서 설립한 평양숭의여학교가 있었다. 미국인 교장을 비롯해서 교사들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것에 대하여 강력히 규탄하며, 목숨 걸고 일본에 항거할 것을 호소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앉혀 놓고, 이제부터는 배워야 살고, 배워야 일본을 이길 수 있다며,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외국 유학까지 가도록 거듭 거듭 당부 했다.
남달리 교육열이 높은 아버지는 송복신을 평양숭의여학교에 입학시켰다.
열 세 살이던 1913년이었다. 평양숭의여학교 교사 황애덕, 김경희, 박정석 3명은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에 항거하며 나라를 위해 싸울 송죽결사대를 조직했다.
이때 송죽결사대와 함께 할 애국심이 강한 제자 20명을 뽑았는데, 송복신도 포함되었다. 송죽결사대는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강화하는 비밀집회를 가지면서 몇 년 후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 운동에 적극 나섰다.
평양숭의여학교는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에 끝까지 불응하다가 1938년 3월 31일에 자진 폐교할 정도로 항일운동의 여학교로 유명했다.
평양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유학 생활 중에도 광복 대업에서 언론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깨닫고 삼일신보의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일본으로부터 불온조선인으로 분류되었다.
그런가 하면 동경조선여자친목회 회원인 동경여의전 학생 현덕신, 정자영, 유영준과 황에스더, 나혜석 등과 함께 동경유학생들이 항일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여 남달리 활동했다.
조선청년독립단은 1918년 11월, 만주ㆍ노령의 ‘무오독립선언서’에 이어, 1919년 2월 8일 일본의 심장 도쿄에서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독립선언서는 여러 나라 대사관과 일본 언론, 조선 총독부 등에 보내졌지만, 많은 유학생들이 붙잡혀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유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숨겨 조국에 전달하기로 하였는데 송복신도 비밀리에 귀국하였다.
동경의 ‘2.8독립선언서’로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손병희를 중심으로 33인의 민족 대표를 뽑아 3・1독립만세운동을 거행하게 되었다.
송복신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성악 기량이 뛰어나 전 이왕직 양악대, 경성악대 등 1백20명의 악사의 반주에 맞춰 독창회를 하기도 하고, 숭의음악 강연회에서 독창,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동경 여자유학생친목회의 졸업생 축하회에서 허영숙, 나혜석 등의 졸업생 답사에 이어 축하 노래를 불러 평양은 물론 많은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유명 인물로 알려졌다.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여름에 북미 미시간대학으로 유학하여 의과 공중위생을 전공하였다.
미국 유학시절에도 항일 독립운동의 의지를 불태웠는데, 1924년 미국 유학생들이 북미조선학생유학회를 결성하여 회계부장을 담당하였다.
1928년 미국 유학생들이 발간한 《우라키》에 『아동 영양부족과 그 원인』 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29년 미국 미시간 대학교에서 『인종별 성장 차이』라는 논문으로 공중보건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한국최초의 여성 박사가 되었다.
송복신이가 박사 학위증을 가슴에 품고 1930년 2월 2일 귀국하자. 이 사실을 《중외일보》 1930년 2월 7일에 크게 보도하여 비록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였지만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용기와 희망을 안겨 주었다.

「-여의박 송복신양
6년간 미국 유학 마치고 금의환향으로 귀국하여-

평양 출생 송복신(27)양은 일찍이 평양 숭현, 숭의의 두 학교를 졸업한 후 동경에 건너가 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923년 여름에 미주로 건너가 북미 미시간대학 의과 공중위생과 연구소에서 6년간 연구를 하여 1928년 동대학을 졸업하여 석사 학위를 받았고 다시 논문을 동대학 박사원에 제출하였던 것이 통과되어 박사 학위를 얻은 후 다시 연구 계속하다가 2일 오후에 고향인 평양에 도착되었는데 2~3개월을 두류하다가 다시 미주에 향하여 연구를 2년간 더 할 예정이라더라.」

송복신의 유학 시절은 인기가 대단하여 그 일화들이 활자로 전해지기가 일쑤였다. 1927년 3월 1일 《별건곤 제5호》에 실린 ‘해외에 흩어져 있는 조선 여의사 평판기’가 쫄깃하게 화제를 모았다.
“응 나 아는 중에도 두어 분 더 있어. 지금 인천 야소교부인병원에 가 계신 전혜덕씨 하고 미국 가서 지금 유학하는 송복신씨 하고 한소제씨가 있지.”
“아하 송복신씨, 한참 동경 재학 시대에 유학생들의 물의가 분분하여 양근환군의 주먹까지 왔다 갔다 했다는 그 여자 분 말인가. 그 분이 의전 출신이던가?”
“나는 그것까지는 몰라도 하여간 일본서 의전을 마치고 바로 미국으로 가더니 요새 들으니까 학위까지 얻었다는 말이 있데.”
“갸륵한 노릇일세. 아무러나 조선 여자도 해외에까지 나아가서 학위까지 얻는데는 그의 고심도 적지는 아니하였겠지. 그리고 조선의 여성이 그렇게 발전하여 나간다는 것이 참으로 기쁜 일이야.”

송복신은 미시간 대학교 재학 중에 윈필드 헨리 라인(Winfield Henry Line)과 만나 캠퍼스 커플로 교제 끝에 결혼했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남편과 본인의 이름을 딴 ‘그레이스 복신 송 라인’이라는 미국 이름을 가졌다.
남편과 함께 ‘윈필드 H. & 닥터 그레이스 송 라인 장학기금(Winfield H & Dr. Grace Song Line Scholarship Fund)도 운영하였다.
이러한 송복신의 동향을 1931년 6월 1일 《삼천리 제16호》에 다음과 같이 소개하기도 하였다.

「송복신 여사도 그 당시 화려한 기억을 주던 여인이었다. 지금은 미국에 가서 고등교육을 받고 영국인인 어떤 유력한 은행가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지내는데 외국에 내놓아도 실로 그 용모나 학식으로 부끄럽지 않을 이는 송복신 낭(娘)이라 하리만치 그때는 경모를 받았다.」

《조선일보》도 송복신의 기억을 소환하듯 1938년 9월 13일자에 이렇게 보도했다.

「동경에서 공부하던 조선 학생 사이에 한때 평판이 있던 미인으로 화제의 주인공인 당시의 송복신양.....그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재학 당시에는 그 교태에 취하여 가슴을 태운 열정 청년도 적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많은 청년 학생들이 불꽃 같이 퍼붓는 사랑도 칼날로 베듯이 다 물리치고 큰 뜻을 품고 태평양을 건너 멀리 미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송복신은 미국에서 임시정부 구미위원부로 활동하던 이승만을 적극 돕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뉴욕 월드프 아스토리아호텔에 태극기를 걸어 놓고 재미 동포들을 초청하여 만찬 파티를 자주 열었는데, 이때도 빠지지 않고 독립자금을 냈었다.
이런 일로 이승만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광복이 되고서 이승만이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하지만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개인적인 친분에 관계없이 재미 교포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강하게 주장하여 미국의 신문에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미국의 유명한 미시간대학에서 한국인 최초 여성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서도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일제강점기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고 미국인이 되어버린 송복신의 사연을 역사적 교훈으로 잊지 말았으면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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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정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