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 도유우불(都兪吁咈) 지방자치에 필요한 이유

도유(都兪)는 찬성, 우불(吁咈)은 반대의 뜻으로, 임금과 신하 간의 토론이나 심의의 뜻으로 쓰인다. 도유(都兪)와 우불(吁咈)은 요(堯)나라의 관직 이름이기도 하다.

이 성어는 요(堯)임금이 신하들과 정사를 의논할 때에 쓰인 말로서 군주와 신하 사이에 정사를 논하면서 찬성과 반대를 하며 의논했다는 내용에서 유래한다. 서경의 내용 일부는 다음과 같다.

禹曰: 都. 帝, 慎乃在位.
우가 말기를, "아름답습니다, 임금님 재위를 신중히 하십시오."

帝曰: 俞.
임금께서 이르기를, "그러하다."

禹曰: 安汝止, 惟幾惟康, 其弼直, 惟動丕應, 徯志以昭受上帝, 天其申命用休.
우가 답하기를, "네 그침을 편하게 하시어 기미를 생각하며, 편안함을 생각하며, 그 돕는 사람들이 곧으면 동하는데로 크게 호응하여 뜻을 기다리듯 하리니 밝게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하늘은 거듭 명령을 내림으로써 축하하실 것입니다."

帝曰: 吁. 臣哉鄰哉, 鄰哉臣哉.
임금께서 이르기를, "아 신하가 이웃이며 이웃이 신하이니라."

禹曰: 俞.
우가 답하기를, "그렇습니다."
(下略)

윗글에서 요순의 시절에 도유우불했다는 말은 '서경(書經)'에서 요임금과 순임금이 신하들과 정사를 토론할 때 찬성과 반대 의견을 거리낌 없이 펼치고, 허물없이 받아들였던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도(都)는 찬미의 뜻이고, 유(兪)는 동의하여 호응하는 표현이다. 우(吁)는 생각이 다를 때, 불(咈)은 반대의 뜻을 나타낼 때 쓴다. 같은 찬성과 반대라도 정도 차이가 있다. 임금의 말이 옳으면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아니라고 생각되면 솔직하게 반대의 뜻을 밝혔다. 그러면 임금은 순수한 마음으로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후대에 이 말은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뜻이 맞아 정사(政事)를 토론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오늘날 토론과 토의는 필수다.
토론과 토의는 한걸음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니 도유우불(都兪吁咈)의 능력과
도유우불(都兪吁咈)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중요하다.

팀의 리더는 도유우불(都兪吁咈)할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고, 리더와 팀원들은 도유우불(都兪吁咈)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과연 전국 지자체중에 도유우불(都兪吁咈)할 능력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곳이 과연 있는가?

예나 지금이나 아랫사람은 상관의 의견에 반대하기 어렵고, 같은 구성원끼리도 의견이 갈리면 뿌리 깊은 상처를 남기기 예사다. 이를 국가조직에 대입해 보면 지자체 단체장의 독선과 일방적 상명하달 방식이 이에 속한다. 인사발령부터 지자체의 이권사업까지 단체장의 입깁이 닿지 않는곳이 없고 바른말을 하는 사람은 한직으로 내치고 감언이설하는 사람만 가까이 하니 풀뿌리 민주주의라 불리는 지방자치제가 발전하지 못하고 민중의 저변에 파고들어 민중의 지지를 얻고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야하는 참여 민주주의는 그 기를 못피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엘리트 위주의 정치행위를 없애기 위해 만든 선출직 단체장이 그 폐단을 답습하고 있다는 말이다.

세종 때 사간원이 올린 상소문에서 “말해야 할 일을 말하지 않는 것은 신의 직책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고, 받아들여야 할 말을 채용하지 않는 것은 정치 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반드시 임금과 신하가 꾀를 같이 하여 도유우불(都兪吁咈) 해야만 정치의 도가 높아질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그만큼 현실에서도 절실하게 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못하면 집단이 경솔하고 불합리한 결정을 내려 크게는 미국의 피그스만 침공 실패 같은 참사를 초래하고, 작게는 애빌린의 역설(Abilene Paradox)에 빠지게 된다. 애빌린의 역설은 아버지가 외식하자고 하자 부인, 사위 등 식구 모두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암묵적 동의를 했다. 전체 분위기를 해칠까 봐 아무도 이견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는 한심했다. 왕복 3시간이나 걸리는 애빌린에 가서 누구도 만족하지 못한 음식을 먹고 와서 그제야 불만들을 털어 놓았다.

이처럼 윗사람의 권위나 집단의 분위기에 눌려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이 국정에 이르면 국가와 국민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숙종도 “임금과 신하가 부화뇌동하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니니, 공익을 위해 가부가 서로 도우라”(숙종 31년, 1705년)고 했는데 바로 이 점을 강조한 것이다. 윗사람의 독선적이고 일방적인 명령에 가까운 주장에 대해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그 집단은 제대로 된 운영이 될 수 없고 망하는 지름길로 달려가는 것이다.

오늘날 도유우불(都兪吁咈)는 비록 거의 쓰지 않는 사자성어가 됐지만 그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 많은 직장과 조직, 가정은 물론 지방자치단체와 주민간의 소통부재 현상이 날로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살리고, 나도 사는 도유우불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요순시대와 같이 태평성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체장과 단체장을 도와 일하는 지역 공무원들, 지역주민들이 찬성과 반대의견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는 토론의장을 마련하여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치열한 토론과 토의를 거쳐 상생과 소통이 존재하는 투명한 행정을 통해 지역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경주 뉴스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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