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21대 국회, 무궁화 국화법 제정 책무 있다

▲ 송명호 (전 문화재청근대문화재전문위원)


Ⅲ. 무궁화의 내력과 역사성 고찰

우리나라 국화는 관습적이긴 하지만 무궁화이다. 무궁화가 국화로 전해진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왕조시대 때는 왕실의 꽃만 존재하였기 때문에 일제강점기로 추정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목근화, 일본은 무쿠게(木槿ムクゲ), 신라・고려에서는 근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는 무궁화라고 했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1878~1938) 선생을 비롯한 민족운동가들이 아침에 피어 저녁에 시든 조생석사(朝生夕死)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고려시대의 근화가 마치 민족운동 정신과 같아서 시대정신에 걸맞은 ‘무궁화’로 이름을 짓고서부터 자연스럽게 나라꽃 국화가 되었다.
그런 근거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인 1925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기사에 보면 『조선국화 무궁화의 내력』이란 내용이 아주 소상하게 적혀 있다.
‘금수강산의 표징’이란 제목 아래 ‘고래로 조선에서 숭상한 근화가 무궁화로 변해 국화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꼭꼭 집어서 알려주고 있다. 옛 글씨 기사를 읽기 쉽도록 현대식 맞춤법으로 고쳐서 소개한다.

「조생석사 영원...금수강산 표징(朝生夕死로 永遠...錦繡江山의 表徵)
-고래로 조선에서 숭상한 근화가 무궁화로 변해 국화가 되기까지-
옛날은 목근화(往普은 木槿花)- 우리가 무궁화라는 것은 근화(槿花)를 이르는 것입니다. 근화를 무궁화라고 하는 까닭은 분명한 사상의 증거는 없습니다마는 근화를 고대에는 목근화(木槿花)라 하였다는 말은 이천오백년전 중국 전국시대에 지은 책《산해경(山海經)》에 ‘군자의 나라(한반도)에는 무궁화가 많다(君子之國多木槿之華)’라 하였고, 그 위에 ‘(전략)무궁화는 아침에 피고 저녁에 시든 것을 다투지 아니했다(전략)不爭有薰華草朝生夕死’라 하였으며, 그 주(注)에 ‘薰(훈)’은 ‘菫(근)’이라 하였으니, 근화를 훈화(薰花)라고도 하고, 흑은 목근화(木槿花)라고도 하였고, 목근화를 그 당시 무궁화 비슷이 발음하여 왔던 모양입니다. 이는 지금 일본에서 무궁화 즉 근화를 ‘무쿠게(ムクケ)’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도 그 당시 발음이‘무궁화’비슷이 혹은 화전되어 무궁화라고 속향에서 불러 내려왔는지도 모른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현대(現代)에 무궁화(無窮花) -그러나 근화 즉 무궁화를 지금과 같이 무궁화(無窮花)라고 쓰게 되기는 극히 짧은 근대의 일이라 합니다. 아마 지금부터 이십오륙 년 전(1900년 전후) 조선에도 개화풍이 불게 되어 양인의 출입이 빈번하게 되자 그때의 선진이라고 하던 윤치호(尹致昊)씨 등의 발의로 ‘우리 대한에도 국가(國歌)가 있어야 된다고’ 한편으로 양악대도 세우고 한편으로 국가도 창작(?)할때 태어난, ‘상제(上帝)가 우리 황상(皇上) 도으사 해옥주(海屋籌)를 산(山) 같이 쌓으소서 권(權)이  환영(環瀛)에 떨치사 억세천만세(憶千萬歲)에 영원무궁(永遠無窮)하소서’ 라는 노래에 부속되어 생겼다고 하는‘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라는 애국가의 후렴인, ‘무궁화 삼천리(無窮花三千里) 화려강산(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이 끼일 때에 비로소 근화, 즉 무궁화를‘무궁화(無窮花)’라고 쓰기 시작한 듯합니다.


국가(國歌)짓고 국화(國花)- 그리고 이를 전후하여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선생 등이 맹렬히 민족운동, 즉 국수운동을 일으킬 때에 조선을 무궁화에 빗대어 청산 같은 웅변을 현하(급한 경사를 세게 흐르는 물) 같이 토할 때마다 ‘우리 무궁화 동산은...’하고는 주먹이 애여질 듯이 책상을 두드리고 연단이 부서질 듯 발을 굴렸습니다. 아마 이러한 자극과 동기로 근화가 무궁화로 변하여 그때에 국민이라고 하던 사람의 귀에 익어지고 입에 오른 듯합니다. 어쨌든 이때를 전후하여 근화를 무궁화라고 뚜렷이 쓰기 시작하고 또한 이것으로써 조선의 국화(國花)를 만든 듯합니다. 그러나 ‘무궁화(無窮花)’라는 글자를 쓴 동기는 순전히 보기 좋고 뜻깊게 하기 위해 쓴 것이지요.


한 때는 이화(李花)- 근화 즉 무궁화가 위에 기록한 바와 같이 그때에 비로소 국화가 되었다 하여 국민의 숭상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먼저 쓴 바와 가치 이천오백년 전 옛날부터 조선 나라(한반도)에는 근화가 많아서 중국 사람의 눈에는, ‘군자의 나라에는 무궁화 꽃이 많다(君子之國 多木槿之華)’로 보였고, 또한 그보다 좀 늦게 《해동역사(海東歷史)》에는 고려시대에서 중국에 글을 보낼 때에 고려를 근화향(槿花鄕)이라고 자칭하였으니, 근화가 고래로 조선에 많았던 것은 사실이 증명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근화에 대한 기록이 조금도 남지를 않았으니 이는 이태조가 조선을 세운 후에 이화(李花)를 숭상 하는 뜻으로 나라의 자랑거리요, 백성이 다 같이 숭상하던 근화를 배척한 듯하다. 그래서 그간 근화가 사람의 눈에서 멀어졌던 것이겠지요.


무궁화 특색- 식물학을 배우지 않았어도 본 사람은 알겠지만 무궁화는 꽃이 그리 화려하지 못하고 가지가 그리 맵시 있지 못하며 잎이 또한 빽빽하여 운치 있지 못하지만 아침에 이슬을 먹으며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나면 다른 꽃송이가 또 피고 또 지고 또 피고 하여 끊임없이 뒤를 이어 자꾸 무성한 것이, 찰나를 자랑하였다가 바람에 휘날리는 무사를 자랑하는 영국의 장미보다도 낫고, 덩어리만 미미하게 커다란 중국의 함박꽃보다 얼마나 끈기 있고 꾸준하고 기개 있고 소담하고 귀여운지 도저히 다른 꽃에 비길 바가 아닐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은 이 조생석사하되 뒤가 있는 근화를 무궁화라 하여 나라의 국화를 정한 듯합니다. 그러나 지금(일제강점기)은 무궁화가 이름 같은 사명을 다하지 못하여 서북도에서는 볼 수 없으며 경기 지방에서는 뜻 있는 사람의 동산 치레나 되었으며 전라도에서는 농가의 울타리감으로 전락하였습니다.」

Ⅳ. 남궁억과 무궁화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 이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등 미국으로 망명하자, 남궁억(1863~1939) 선생은 무궁화 보급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남궁억 선생은 알려진 바와 같이 한말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며 언론인이었다. 궁내부 별군직, 칠곡부사, 내부 토목국장 등을 역임하였고 독립협회에서 활약하였다. 양양군수, 대한협회장, 관동학회 회장 등을 지내고 배화학당 교사로 있으며 교과서를 편찬하고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남궁억 선생은 서른두 살 때 대한제국 토목 국장이었는데 그때 탑골 공원을 만들면서 울타리에 무궁화나무를 심어 공원의 조경을 더욱 아름답게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파헤쳐져 벚꽃을 심기도 하였다.
1901년부터는 배화학당 교사로 재직하였는데 학생들에게 남달리 무궁화에 대한 정신과 사랑을 가르쳤다.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부터는 무궁화 사랑이 더욱 뜨거워졌는데, 특히 여학생들에게 우리나라 지도를 무궁화로 수놓게 하여 민족의식을 심어 주었다. 여학생들이 수놓은 무궁화 지도는 애국지사들에게 전해져 그들의 애국심을 더욱 고취시켰다.


이 소문이 일본 경찰의 귀에 들어가자 경찰들이 남궁억 선생을 감시하게 되었다. 남궁억 선생은 하는 수 없이 1918년에 강원도 홍천군 보리울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숨어 지내는 동안 학생들에게 무궁화를 가꾸기 교육과 학교 실습지에 무궁화 묘목 30만 그루를 생산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보급하였다.


이런 동향이 일본 경찰에 밀고 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2년 후인 1939년 4월에 “내가 죽거든 부디 무궁화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 되게 해 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뉴스젠,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우성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