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이어 정부 노리는 투기자본 … 얕보이면 '손쉬운 먹잇감' 전락

▲엘리엇 로고

한국 정부가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에 총 1300억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국제 상설중재재판소(PCA)의 최근 판정에 대해 불복 절차 신청을 검토하는 가운데 정부가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에서 공세적 전략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한국 정부가 외국인 투자자 사이에서 손쉬운 소송 타깃으로 인식될 가능성을 차단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PCA 중재판정부는 지난 20일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달러(약 690억원) 배상금과 법률비용 2890만달러(약 372억원), 지연이자 등을 지급하라고 판정했다. 배상금 기준으로 당초 엘리엇이 청구한 7억7000만달러(약 9917억원)의 7% 수준에 그쳤지만 배상금 절대 액수가 적은 것은 아니다. 또 다른 미국계 사모펀드 메이슨도 같은 사건으로 2억달러(약 2700억원) 배상금을 청구하는 ISD를 제기한 상태다.

지난해 8월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는 '론스타·외환은행 사건'과 관련해 한국 정부가 론스타 측에 2억1650만달러(약 2857억원)를 배상하라고 판정했다. 법무부는 판정문 정정 신청을 제기해 배상원금 6억원가량을 줄였고 판정 취소소송을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또 정부는 이란 다야니 가문과 두 번째 ISD 소송을 진행 중이다. 다야니가는 2010~2011년 당시 대우일렉트로닉스 인수·합병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한국·이란 투자보장협정(BIT)을 위반했다"며 2015년 935억원 규모 ISD를 내 730억원 지급 판정을 받아냈다. 정부가 대(對)이란 제재를 이유로 배상금 지급을 미루자 다야니가 측에서 2차 소송을 제기했다. 스위스 엘리베이터 기업 쉰들러도 2018년 10월 한국 정부를 상대로 1억9000만달러(약 2500억원) 규모의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 정부를 상대로 ISD가 잇따르는 가운데 정부에 공세적 대응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경영 지배구조에 대한 ISD 패소 선례가 생기면 앞으로 비슷한 소송이 계속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며 "정부가 론스타 판정에 대해 불복 절차를 밟는 것도 돈 문제보다는 선례를 만들지 않음으로써 앞으로 우리가 (ISD 소송을) 당하지 않는 방어책을 만든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엘리엇과 같은 종류의 소송이 현재 2500억원 규모로 진행 중인데 판례가 생겼기 때문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며 "최대한 보상액을 깎고 혈세 낭비를 최소화하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정상적인 비율로 합병이 이뤄졌을 때 누렸어야 했을 이득과 엘리엇이 주식매수청구권을 처분해 얻었던 이익 혹은 손해와 비교해야 한다"며 "재판부가 당초 엘리엇이 주장한 7억7000만달러 중 7% 정도만 인정했다는 것은 엘리엇이 주식매수청구권 처분을 통해 상당한 이득을 받았음을 암묵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계적으로 국제투자분쟁(ISDS)이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한국은 특히 증가세가 두드러진 국가로 꼽힌다. 세계에서 가장 ISD가 많은 나라는 아르헨티나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정부는 현재까지 총 62여 건의 ISD에 휘말렸다. 한국 정부는 ISD 누적 피소 건수가 10건에 달해 전 세계 국가 중 빈도가 높은 편에 속하지는 않지만 증가 속도가 빠르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한국이 '아시아의 아르헨티나'가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국이 글로벌 헤지펀드의 타깃이 되는 이유는 외자 유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투기자본 세력에도 많이 노출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특히 2012년 론스타가 소송을 제기하면서 한국 정부와 소송해 이기면 배상금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퍼졌다. 법무법인 율촌 국제중재팀장인 안정혜 변호사는 "한국은 적극적으로 해외 자본을 유치한 데다 론스타 소송으로 불확실성이 줄면서 ISD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권 교체나 여론에 따라 정책 연속성이 떨어진다는 점도 소송의 원인이다. 승소하면 배상금을 쉽게 받아내는 측면 또한 있다. 안 변호사는 "한국은 집행 면에서 용이한 편"이라며 "정부가 막대한 배상금을 낼 여력이 있는 데다 소송에 이긴 뒤 보복 조치가 없는 등 소송을 제기한 쪽에선 위험 부담보다 실익이 큰 편"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취소소송은 실익이 적을 수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송기호 법무법인 수륜아시아 대표변호사는 "한국은 엘리엇에 대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 규정한 국가의 '조치' 행위가 없었다면서 엘리엇 중재 판정이 한미 FTA를 적용할 관할권이 없다는 것을 취소소송 사유로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며 "그러나 국제 중재 판례는 FTA에서의 '조치'를 넓게 해석하고 있어 영국 법원이 관할 위반이라고 판결을 할지는 의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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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 기자 다른기사보기